<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예천 권씨[1] |
자 / 호 | 도장(道壯) / 중산(重山) |
출생 | 1898년 7월 25일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 | |
사망 | 1936년 5월 29일 |
대구형무소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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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권원하는 1898년 7월 25일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에서 아버지 권해진(權海鎭)[2]과 어머니 선성 김씨(宣城 金氏) 김용규(金龍奎)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첫째 숙부 권영진(權泳鎭)에 입양되었다.그는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고 1913년 왜관보통학교에서 재학한 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1917년 3월 중퇴하고 4월에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부산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가담한 후 만주로 망명했으며, 1919년 8월 신흥무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학했고 1920년 2월 졸업했다. 이후 독립운동자금 및 병사 모집 임무를 띠고 귀국했다.
이후 군자금 및 무관생도 모집 활동을 전개했으나 1920년 7월 최재화(崔載華)·조강제(趙强濟)·배승환(裵昇煥)·김영철(金永哲) 등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서울청년회에 가입했고 적박단(赤雹霍) 부단장을 지냈으며, 대구에서 철성단(鐵城團)을 조직했다. 한편 조선일보 지국장을 지내면서 은밀히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7년 6월에는 김상기(金相起)·남병태(南炳台)·박창호(朴昌鎬)·장대발(張大發) 등과 함께 예천군내 청년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했다.
1929년 8월 예천농민조합 중앙위원장, 11월 신간회 예천지회 임시대회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2월 예천농조 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5월엔 '상주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5월에 석방되었으며, 이후 예천청년동맹회의 집행위원으로서 전예천청소년운동(全禮泉靑少年運動)의 통일을 기하여 계몽운동에 주력하다가 재차 검거된 뒤 1935년 5월 대구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5월 29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권원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