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영명길 29 ( 구암동)에 위치한 역사 공원이다.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선교사를 보내왔는데 그 중 전킨(Wiliiam McCleery Jun Kin/한국명 전위렴) 선교사 부부와 드루(Dr. A. Damer Drew/한국명 유대모) 의료선교사 부부가 1895년 현 해신동[1]에 있는 수덕산[2]에 정착하였다가 군산 선교 스테이션(Gunsan Mission Station)이라 하여 현재 공원이 위치하고 있는 궁멀마을(現 구암동) 지역으로 옮겨왔고 구암교회, 구암예수병원, 군산구암유치원, 군산알락소학교(現 군산구암초등학교), 군산영명학교(現 군산제일중학교, 군산제일고등학교), 군산멜본딘여학교(現 군산영광중학교, 군산영광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선교 및 의료교육사업을 하였던 곳이다.
1919년 3월 5일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군산영명학교와 군산멜본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구암예수병원 사무원들과 구암교회 성도들이 주축이 되었다.
2. 주요 시설
2.1. 역사공원 입구
2.2. 옛 구암교회(군산 3.1운동 기념관)
군산의 3.5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된 장소이다. 물론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만세운동 당시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위의 건물은 만세운동 끝나고 시간이 꽤 지나고 새로 지어진 것이다. 군산시에서 이 옛 구암교회를 2007년 매입하여 기념관으로 조성하였다.
2.3. 현 구암교회(호남 선교 기념 예배당)
구 구암예수병원 직원숙소 자리에 새로 건물을 건축하여 옮겨왔다
건물 옆에 군산 3.1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4.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이 위치에 한강 이남 최초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자 총예산 39억7000만원(특별교부세 3억원, 시비 36억7000만원)을 투입해 연면적 969.2㎡ 지상3층 규모로 건립되었다. 당시 세워졌던 군산영명학교(現 군산제일중학교, 군산제일고등학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1층 추모기록실(독립의 빛)은 군산3·5만세운동과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고 있으며, 추모의 벽을 만들어 나라를 위해 희생한 애국지사를 추모할 수 있는 공간. 2층 재현역사실(그날의 함성 속으로)에는 관광객들이 직접 당사자가 돼 그날의 함성과 나라사랑 정신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공간. 3층은 체험교육실(그들과의 이어짐)로 태극기 만들기와 태극기 전파하기, 만세운동 전파하기, 겨레의 함성, 독립군 기념촬영 등의 체험공간으로 이뤄졌다.
2.5. 기념 조형물
이 기념 조형물 아래 있는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우리 고장 군산의 3.1 운동사
병자수호조약(1876년)으로부터 23년 후 1899년 5월 1일 군산이 개항되었다. 11년 후 한일합방(1910년)이 되었고, 그 여세로 인해 군산은 일본인 득세의 독점도시가 되고 말았다. 쌀 수출의 수송 증가로 1914년 군산은 전국 제 1의 수출항이 되어 비극적인 일제의 쌀 착취장소로 변해 버렸다. 1919년에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228명이나 더 살고 있는 일본인 도시화가 되었고, 1920년에는 일제 식민정책의 식량 및 원료 생산지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군산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천시와 수모의 핍박 속에서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입국한 美 남장로교 7인의 선교사들 중 전킨 선교사 부부와 의료선교사 드루 선교사 부부의 군산선교스테이션이 충청도와 호남지역의 선교지 교두보로 궁멀(현 구암동)의 구암동산에 형성되어 그 규모나 조직면에서 외세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할수 있는 여건들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1세대들이 교사가 되어 교단을 지키며 나라사랑의 뿌리를 둔 항일항쟁이 시작되었다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 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 을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군산3.1만세운동은 김병수(군산영명학교 졸업/당시 세브란스 의전 학생)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 선언서" 200여매를 전달받아 군산영명학교 스승인 박연세, 이두열에게 1919년 2월 28일 전달함으로써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시작되었다.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3,500매) 복사와 태극기 수백장을 그리고 만드는 작업을 비밀리에 착수하여 3월 6일(음력 2월 5일) 설애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영명학교 전 교직원, 전교생, 구암병원 사무원, 교회 신자들과 일반 시민까지 모두 참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전모임의 결의와 준비로 3월 4일까지 거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으나 돌연 3월 4일 새벽 군산경찰서의 일본인 무장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송정헌 등을 구인(拘引)하는 바람에 사전 발각되어 좌절될 뻔 하였다. 그러나 김윤실 교사를 중심으로 격분한 학생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3월 4일에 잡혀간 교사들의 석방을 위한 시위가 첫 만세시위 운동이었다.
일본 경찰이 1차 학생시위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유치한 후 방심하는 사이 3월 4일의 만세시위 진압이 자극제가 되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에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그 규모는 컸었다. 주로 학생들에 의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고 체포를 면한 기독교 학교인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 교사와 학생, 구암예수병원 사무원, 구암교회 교인들이 합세하면서 백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500여명으로 늘어나 성난 노도와 같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계속되었다.
군산3.1만세운동은 28회(31,500명 참여/피살자 53명/부상자 72명/투옥자 195명)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당시 일본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본인 득세 중심의 도시 속에서 자주독립의 확고한 의지를 힘있게 알리며 꽃피운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는 자랑스런 우리고장 군산의 긍지요 애국애족의 항일항쟁 운동으로써 호남지역 3.1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거사다. 이로인해 대구복심법원에서 군산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교사4명, 학생11명, 병원사무장 9명, 교회신자 2명, 시민8명)
세계사에 길이 빛나는 우리민족 운동인 3.1운동, 자랑스런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의 발상지이며 당시 신문화를 주도했고 군산팔경 중 한 곳 궁포귀범(弓浦歸帆)인 이 곳, 구암동산을 후손들에게 살아 숨쉬는 역사의 교육장으로 성역화하여 애국애족의 숭고한 깊은 뜻을 높이 기리며 계속 받들고 이어 나가고자 한다.
2015년 3월 1일
국가보훈처(익산보훈지청), 군산시, 군산3.1만세운동기념사업회
병자수호조약(1876년)으로부터 23년 후 1899년 5월 1일 군산이 개항되었다. 11년 후 한일합방(1910년)이 되었고, 그 여세로 인해 군산은 일본인 득세의 독점도시가 되고 말았다. 쌀 수출의 수송 증가로 1914년 군산은 전국 제 1의 수출항이 되어 비극적인 일제의 쌀 착취장소로 변해 버렸다. 1919년에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228명이나 더 살고 있는 일본인 도시화가 되었고, 1920년에는 일제 식민정책의 식량 및 원료 생산지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군산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천시와 수모의 핍박 속에서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입국한 美 남장로교 7인의 선교사들 중 전킨 선교사 부부와 의료선교사 드루 선교사 부부의 군산선교스테이션이 충청도와 호남지역의 선교지 교두보로 궁멀(현 구암동)의 구암동산에 형성되어 그 규모나 조직면에서 외세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할수 있는 여건들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1세대들이 교사가 되어 교단을 지키며 나라사랑의 뿌리를 둔 항일항쟁이 시작되었다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 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 을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군산3.1만세운동은 김병수(군산영명학교 졸업/당시 세브란스 의전 학생)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 선언서" 200여매를 전달받아 군산영명학교 스승인 박연세, 이두열에게 1919년 2월 28일 전달함으로써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시작되었다.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3,500매) 복사와 태극기 수백장을 그리고 만드는 작업을 비밀리에 착수하여 3월 6일(음력 2월 5일) 설애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영명학교 전 교직원, 전교생, 구암병원 사무원, 교회 신자들과 일반 시민까지 모두 참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전모임의 결의와 준비로 3월 4일까지 거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으나 돌연 3월 4일 새벽 군산경찰서의 일본인 무장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송정헌 등을 구인(拘引)하는 바람에 사전 발각되어 좌절될 뻔 하였다. 그러나 김윤실 교사를 중심으로 격분한 학생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3월 4일에 잡혀간 교사들의 석방을 위한 시위가 첫 만세시위 운동이었다.
일본 경찰이 1차 학생시위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유치한 후 방심하는 사이 3월 4일의 만세시위 진압이 자극제가 되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에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그 규모는 컸었다. 주로 학생들에 의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고 체포를 면한 기독교 학교인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 교사와 학생, 구암예수병원 사무원, 구암교회 교인들이 합세하면서 백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500여명으로 늘어나 성난 노도와 같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계속되었다.
군산3.1만세운동은 28회(31,500명 참여/피살자 53명/부상자 72명/투옥자 195명)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당시 일본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본인 득세 중심의 도시 속에서 자주독립의 확고한 의지를 힘있게 알리며 꽃피운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는 자랑스런 우리고장 군산의 긍지요 애국애족의 항일항쟁 운동으로써 호남지역 3.1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거사다. 이로인해 대구복심법원에서 군산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교사4명, 학생11명, 병원사무장 9명, 교회신자 2명, 시민8명)
세계사에 길이 빛나는 우리민족 운동인 3.1운동, 자랑스런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의 발상지이며 당시 신문화를 주도했고 군산팔경 중 한 곳 궁포귀범(弓浦歸帆)인 이 곳, 구암동산을 후손들에게 살아 숨쉬는 역사의 교육장으로 성역화하여 애국애족의 숭고한 깊은 뜻을 높이 기리며 계속 받들고 이어 나가고자 한다.
2015년 3월 1일
국가보훈처(익산보훈지청), 군산시, 군산3.1만세운동기념사업회
3. 여담
* 2020년 8월 5일 군산시 블로그기자단에서 군산 3.1운동역사공원에 대한 글을 올렸다. #
수덕공원에 대한 글도 올라와있으니 참고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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