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f> 국제여단 Brigadas Internacionales International Brigad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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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 엠블럼 | |
창설일 | 1936년 9월 18일 | |
해산일 | 1938년 9월 28일 | |
소속 | 스페인 제2공화국 | |
규모 | 59,000명 | |
주요 구성원 국적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미국|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프랑스 제3공화국|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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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 |
그대들과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Por vuestra libertad y la nuest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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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 전투 | 스페인 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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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제여단(國際旅團 스페인어: Brigadas Internacionales, 1936년 ~ 1938년)은 스페인 내전 당시 세계 각국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모인 의용군으로 이루어졌다. 53개 국가에서 모인 약 3만 2천여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에 대항하였다. 사회주의자 뿐만 아니라 윈스턴 처칠의 조카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도 극우 파시즘을 막기 위해 지원하기도 하였다. 국제 여단기는 당시 스페인 인민전선의 기에서 따온것이다.2. 설립과 지원
1936년 9월 스페인 공산당은 스페인 내전에서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외국인 의용군을 요청하였다. 프랑스 공산당을 통해 소련에 전달된 이 요청에 따라 코민테른의 선전가 빌리 뮌젠베르그는 서방측에 의용군 지원을 요청한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의용군 지원자는 내무인민위원회의 보안 심문을 거쳐야 했다.9월 말 프랑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은 스페인 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한 의용군 파견을 결정한다. 이탈리아 공산청년회의 전임 서기장이었던 루이기 롱고는 가능한 최대의 지원을 스페인 정부에 약속한다. 소련은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던 예비역 적군의 지원을 약속하였으나 당시 스페인의 총리였던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지도자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는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내전이 시작되고 프랑코 군의 진격이 급박해 지자 마음을 바꾸었다. 이로써 10월 22일 소련 측 의용군의 파견이 결정된다. 그러나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불간섭 조약을 위배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국제 여단의 모병은 프랑스 파리에서 이루어졌으며 소련의 카롤 시비에르체프스키 장군이 주도하였다. 1936년 10월 17일 스탈린은 호세 디아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스페인의 파시스트 반란은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당면한 문제"라며 코민테른을 비롯한 전 세계에 지원을 호소할 것을 주문하였다. 동남유럽의 의용군 모집은 훗날 요시프 브로즈 티토로 널리 알려진 유고슬라비아인 요시프 브로즈가 담당하였다. 의용군은 열차와 선박을 이용하여 스페인의 알바세테 주로 보내졌다. 초기 의용군은 수속 절차나 교전 시기등이 정해지지 않아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국제 여단의 결성에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한 반면 아나키즘 세력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스페인을 파시즘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믿은 자가 있어 500여명의 아나키스트 의용군이 스페인으로 향했다. 국제 여단의 지도부는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3인방으로 구성되었는데, 프랑스 공산당의 앙드레 마르티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탈리아 공산당의 루이기 롱고가 부사령관을 이탈리아의 생디칼리즘 노동운동가 귀세페 디 비토리오가 정치위원을 맡았다. 군복은 프랑스 공산당에서 지원하였다.
국제 여단의 모병 소식에 파시즘으로부터 민주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많은 나라의 의용군이 자원하였다. 이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즘 뿐 아니라 윈스턴 처칠의 조카 에스먼드 로밀리와 같은 자유주의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헤밍웨이, 조지 오웰 등의 지식인들도 참전하였다.
초반에는 위에서 말한대로 나름 동기부여도 철저했고 1차대전 참전용사들도 있었기 때문에 특히 마드리드 전투 등 당시 공화파의 없는 살림에 상당히 유용했다. 하지만 1937년 봄이나 중순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대우도 안 좋아지고 폭동이 터지거나 전염병도 발생하여 소련인들이 강제수용소를 설치 운영하거나 아니면 그냥 스페인에 입국한 외국어 전문가나 기술자를 강제로 징집하거나 상륙한 선원들을 탈영병으로 체포해 이송하는 등의 식의 폐해가 있었고 이것이 국외에도 알려지면서 국제여단의 평판이 안 좋아졌고 따라서 외국인들이 별로 안 모였기 때문에 자국민들로 국제여단을 채워나가며 근근이 꾸려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골칫덩어리로 전락한 것도 있고 1938년 당시 국제정치적 계산[1]도 있어서 국제여단은 해산되었지만 돌아갈 나라가 없는 이들은 스페인 국적을 받고 인민군에 편제되었다. 이는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은 물론이고 안드레 카스텔의 국제여단이라는 책에서도 전하고 있는 사실이다. 치아노의 일기에 따르면 1939년 1월 바르셀로나 함락 직전 여전히 400여명의 국제여단원들이 수감되었다고 했고 엔터니 비버는 이를 혼란한 상황에서 정부의 무능과 관료의 나태 탓으로 보았다.
3. 군가
자세한 내용은 그들은 지나가지 못하리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국제여단을 해산하는 대신 독일, 이탈리아의 의용군 해산도 촉구하려는 의미다. 이 때 국제여단에 속한 외국인들은 7102명 밖에 없었으며 다른 출처에 따르면 막상 국제여단 병력의 절반 이상은 스페인인들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