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 |||||||||||||||
1번 f단조 |
2번 B장조 '10월 혁명에 바침' |
3번 E♭장조 '5월 1일' |
4번 c단조 | 5번 d단조 | |||||||||||
6번 b단조 |
7번 C장조 '레닌그라드' |
8번 c단조 | 9번 E♭장조 | 10번 e단조 | |||||||||||
11번 g단조 '1905년' |
12번 d단조 '1917년' |
13번 b♭단조 '바비 야르' |
14번 | 15번 A장조 |
정식 명칭: 교향곡 제10번 E단조 작품 93
(Sinfonie Nr.10 e-moll op.93/Symphony no.10 in E minor, op.93)
1. 개요
쇼스타코비치의 열 번째 교향곡. 소위 메이저급 교향곡 작곡가로서 9번 교향곡의 저주를 돌파한 사례가 되었지만, 그 때까지 쇼스타코비치의 입지는 그리 안정되지 못했다. 전작인 9번이 소련 문화예술계 실권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다른 작품들도 연주 금지나 제한 조치를 받는 등, 1930년대 중반에 행해졌던 레이드에 버금가는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결국 그는 스탈린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줘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고, 이런저런 영화음악이라든가 서기장 동지에 대한 찬양이 포함된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등 '정권 접대용' 작품들을 만들면서 비난의 소용돌이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또한 이러한 보여주기식 작품 외에도 현악 4중주나 협주곡 같은 체제 선전성과 거리가 먼 순음악 계통의 곡들도 몰래 작곡하거나 구상했고, 이들 작품은 스탈린의 사망 이후에야 발표되었다. 이 곡도 마찬가지여서, 스탈린 사후 무서운 스피드로 쓰기 시작해 1953년 가을에 완성했다. 다만 쇼스타코비치의 지인들 중에는 '작곡 시기가 1953년 여름부터 가을까지라고는 하지만, 구상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라는 견해도 있다.
2. 편성
악기 편성은 플루트3(2, 3번 주자는 피콜로를 겸함)/ 오보에 3(3번 주자는 코랑글레를 겸함)/ 클라리넷 3(3번 주자는 E♭클라리넷을 겸함)/ 바순 3(3번 주자는 콘트라바순을 겸함)/ 호른 4/ 트럼펫 3/ 트롬본 3/ 튜바/ 팀파니/ 심벌즈/ 스네어드럼/ 베이스드럼/ 탐탐/ 트라이앵글/ 탬버린/ 실로폰/현 5부(제1 바이올린-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3. 곡의 형태
8번과 9번에서 5악장 형식을 취하던 것에서 다시금 고전적인 4악장 형식으로 복귀하고 있는데, 스케르초에 해당하는 빠른 악장과 느린 악장이 각각 2악장과 3악장에 놓인 것은 1번, 5번이나 7번과도 비슷한 구성이다.다만 전작인 7번이나 8번에서처럼 이 곡도 1악장이 거의 21~25분이나 걸릴 정도로 전곡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보통 속도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여리고 무겁게 연주하며 시작하는데, 8번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동기의 첫 부분에 나오는 음형인 마(E)-올림바(F#)-사(G)가 전곡에서 이곳저곳 등장해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악기들의 나지막한 연주가 끝나면 클라리넷 솔로가 첫머리의 순차 상행하는 3음 동기를 포함하는 첫 번째 주제를 불기 시작한다. 아직은 내성적이고 섬세한 분위기지만, 이 주제가 제시된 후 상행 3음 동기가 리듬을 바꿔가며 줄기차게 반복되면서 전체 관현악이 연주하는 형태로 한 차례 부풀어오른다.
이 흐름이 가라앉고 나면 템포가 좀 더 당겨져 플루트 솔로가 역시 나지막하게 두 번째 주제를 연주하는데, 첫 번째 주제보다는 좀 더 율동감이 있지만 심한 도약이나 강약 대비 없이 비교적 담담한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주제도 8분음표로 된 동기들이 여러 차례 변화되고 반복되면서 한 차례 크게 솟구치는 형태로 발전된다.
이어지는 발전부는 다시 속도가 떨어지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바순이 클라리넷이 연주했던 첫 주제를 연주하며 시작한다. 이것이 다른 악기들로 옮겨가기 시작하면서 다시 고조되고, 그 동안 크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던 금관악기들과 타악기들도 두 번째 주제의 동기들을 가지고 발전시키는 대목에서 등장해 클라이맥스를 형성한다.
하지만 7번과 8번에서 보여준 처절함이나 과격함으로까지 치솟지는 않고, 흥분이 진정된 뒤에는 다시 두 주요 주제들을 연주하는 재현부로 들어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며 끝맺는다. 주제의 재현은 이전 교향곡들에서처럼 두 번째-첫 번째 순으로 역순으로 행해진다.
2악장은 비교적 가라앉고 내성적인 분위기였던 1악장과는 상극을 이루는 빠르고 과격한 대목으로, 아마도 이 교향곡에서 가장 유명한 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형식이 있다기 보다는 스피드와 악상의 굴곡을 강조하는 스케르초라고 할 수 있는데, '스탈린의 초상'을 그린 것이란 말이 있다. 현악기들의 거친 연주 바로 뒤에 나오는 목관악기들의 선율 속에서는 1악장 초반부에 등장한 순차 상행 3음 동기가 섞여 있고, 이후 이 선율을 이리저리 변형시키는 와중에도 계속 끼워넣어 강조하고 있다. 이 악장은 '평가' 란에도 나오겠지만, 네 개 악장 중 가장 짧은 길이라서 형식미가 파괴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도 공식 석상에서 이를 인정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길이를 늘이는 등의 개작은 전혀 하지 않았다.
3악장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바이올린이 저음역 위주의 짤막한 악상을 제시하며 시작한다. 박자도 3/4박자고 어느 정도 율동감도 있어서 왈츠삘이 많이 나는 대목인데, 그렇다고 댄스 리듬만으로 거나하게 흐르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1악장과 마찬가지로 차분한 편이지만, 악상 사이의 강렬한 대비나 율동감의 가미로 좀 알쏭달쏭하고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을 듯. 바이올린이 제시한 악상에 이어 플루트와 피콜로가 두 번째 주요 악상을 제시하는데, 이 악상이 꽤 중요하다.
네 마디 가량의 이 두 번째 악상 후반부에는 라(D)-내림마(Eb)-다(C)-나(B) 음형이 나오는데, 이는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이름을 독일어식 음정 표기에 끼워맞춘 이니셜이다.[1] 이 이니셜 음정은 첼로 협주곡 제1번이나 현악 4중주 제8번 같은 후속작들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 애호가들에게 흥미로운 떡밥으로 남아 있다.
이어 호른이 큰 소리로 연주하는 악상도 첨가되는데, 뜯어보면 선배인 말러의 '대지의 노래' 1악장 첫머리에 나오는 호른 선율과 비슷한 음 구조로 되어 있다. 이 호른 악상은 악상 제시 후 발전부에서 쇼스타코비치 이니셜 악상과 자주 엮어져 나오는데, 쇼스타코비치가 총애했던 제자
마지막 4악장은 느린 인트로로 시작하는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좀 우울한 느낌의 악상을 조용히 켜면서 시작한다. 이 악상은 목관악기들의 솔로 연주로 계속 이어지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가라앉은 상태다. 3분을 넘게 이러다가 갑자기 클라리넷의 춤곡풍 부점리듬으로 속도가 빨라지고 분위기도 비교적 밝게 변한다.
클라리넷의 리듬에서 바로 파생되는 바이올린의 주제는 조지아의 전통 춤이자 춤곡인 고파크 스타일인데, 스탈린의 고향 조지아와 밀접하게 관련되므로, 후에 2악장의 주제 단편이 나오는 것과 관련지어 스탈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한창 밝게 진행된다 싶을 즈음 2악장에서 따온 주제의 단편이나 쇼스타코비치 DSCH 이니셜 음형 등이 첨가되면서 잠시나마 거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가라앉은 뒤에는 다시 쾌활한 고파크 리듬이 들리기 시작하고 쇼스타코비치 이니셜도 지배적으로 나타나며, 6번 3악장에서처럼 쏜살같이 내달리다 마지막에 호른과 팀파니가 DSCH 이니셜 음형을 강조하며 끝맺는다.
이 쇼스타코비치 음형 결말은 교향곡 10번이 스탈린 사후 급속도로 작곡된 것과 관련지어 쇼스타코비치 자신이 결국 위기를 넘기고 스탈린에게 승리했다는 은유로도 해석된다.
4. 초연과 출판
1953년 12월 17일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지휘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초연했고, 이듬해에 소련 국립음악출판소에서 악보가 간행되었다. 소련 내에서 진행된 논쟁과 더불어 이 곡에 대한 서방의 관심도 급상승했고, 이듬해에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도 공연되었다. 다만 프랑스의 경우 당시 베트남을 비롯한 식민지에서 공산주의 세력들이 이끄는 빨치산들에게 한창 털리던 중이어서, 보복 심리 때문인지 이 교향곡의 공연을 금지하기도 했다. 물론 일시적이었지만.5. 평가
5번 다음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쇼스타코비치 생전에도 그렇고 사후에도 굉장한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곡이다. 4악장의 '해피 엔딩'에도 불구하고 곡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내향적이고 무겁다는 점이 옹호와 비판 양쪽에서 거론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이 곡이 그 동안 소련 음악계에서 반영하지 못한 갈등 논리를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성공했다고 했지만, 비판하는 쪽에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논리를 내세우며 인민의 낙관성과 긍정적 사고관을 해치고 있다고 반격했다.음악적인 면에서 행한 비판도 여러 가지가 나왔는데, 2악장과 4악장이 너무 짧아 상대적으로 길고 비중이 큰 1악장과 3악장과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왔다. 결국 이 곡을 둘러싼
쇼스타코비치는 토론회 석상에서 주로 정치적인 비판 보다는 형식 상의 문제 같은 음악적인 비판에 대한 인정과 해명 위주로 발언했고, '내가 이 곡에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감정과 정열이었다' 고 주장했다. 소련보다는 여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던 서방에서는 이 곡이 스탈린 시기의 폭거와 비극을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고, 이 주장은 소련 문화예술계의 획일성을 비판하는 데도 쓰였다.
여전히 소련 음악계의 요직들을 차지하고 있던 반대파의 공격력은 꽤 강한 편이었지만, 예전처럼 쉴드쳐주던 강한 지도자도 없었고 전체적으로 해빙기를 맞고 있던 소련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역공격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공식적으로 이 작품은 '낙관적인 비극' 이라는 애매한 평가를 받았고, 연주 금지 등의 조치 없이 계속 공연되고 녹음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작곡 당시부터 이 작품은 서방 음악가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아온 작품이기도 하다. 이전의 7번 교향곡이 곧바로 유럽과 미국에서 연주된 것처럼, 이 곡도 초연 직후부터 서방에서도 연주되기 시작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특히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쇼스타코비치 해석을 좋아해 자신이 따로 연주하거나 하지 않았는데도[3] 유독 이 곡만은 두번이나 녹음하고 소련 연주여행을 간 1969년에는 작곡가 본인 앞에서 연주했을 정도. 쇼스타코비치도 연주를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한 듯하다.
음악적인 면 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도 꽤 강한 임팩트를 준 작품이라, 현재까지도 꽤 자주 공연되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곡이다.
[1]
독어식 음정 표기를 적용하면 라는 D, 내림마는 S, 다는 C, 나는 H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을 독어 발음대로 표기하면 Dmitri Schostakowitsch이며, 둘을 맞춰보면 Dmitri SCHostakowitsch.
[2]
호른의 악상은 쇼스타코비치 이니셜보다는 좀 억지같지만, 프랑스어와 독일어 음정 표기를 혼용하면 마(E. 독)-가(La. 프)-마(Mi. 프)-라(Re. 프)-가(A. 독)가 된다. 늘어놓고 끼워맞춰보면 E-La-Mi-Re-A.
[3]
다만 딱히 므라빈스키를 존중해서라기보단 반소련 감정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좋든 싫든 소련 음악계의 아이콘이었으니.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인 로스트로포비치와도 친밀했고 소련의 음악가들인 오이스트라흐, 리흐테르 등과 음악을 한 것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