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작자 미상 /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한글로 쓰인 국문소설로 곽씨와 장씨 두 가문의 이야기를 담았다. 전 10권 10책에 달하는 장편소설이다. 깨끗한 궁체로 쓰였다.
2. 필사본
1773년(영조 49) 봄에 청연공주(당시 20세), 청선공주(당시 18세), 궁녀 덕임(당시 21세, 훗날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영희, 경희, 복연 등 궁중 여인 6명이 《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전 10권 10책)을 필사했다.성덕임은 혜경궁 홍씨가 딸처럼 아끼는 궁녀였다. 때문에 혜경궁의 딸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친분이 있었고 필사를 함께 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희, 경희, 복연이라는 궁녀들[1]도 혜경궁의 처소 궁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빈 성씨가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씌었다.
이 책은 본래 낙선재 혹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낸 국어학자 방종현(1905~1952)의 호(일사)가 찍힌 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6.25 전쟁 전에는 서울대학교에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후 6.25 전쟁 중에 민간에 유출되어 부산으로 흘러들어간 듯하다. 1968년 ~ 1969년 무렵에 부산의 한 고물상이 책을 뜯어서 병풍으로 쓰려던 것을 고서 수집가 홍두선이 발견하여 가지고 있다가 2008년 무렵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인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전시 중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바로 옆에는 정조가 즉위식을 한 경희궁이 있는데, 정조의 후궁과 여동생들이 필사한 소설이 정조가 거처했던 경희궁 옆 박물관에 전시되었음이 흥미롭다.
1997년 당시 고려대 국문학과 대학원생이었던 지연숙 교수가 이 책에 대해 연구하여 고려대 석사 논문을 썼다. # 궁중 여인 최소 6명( 청연공주, 청선공주, 의빈 성씨, 궁녀 영희, 경희, 복연)이 소설을 필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문학사적으로 획기적인 일이라고 평했다.[2] "리어카서 건지고, 표구점서 구출하고"
2.1. 의문점
청연공주는 1765년(영조 41), 청선공주는 1766년(영조 42)에 혼인했다. 그래서 필사를 주도했던 1773년(영조 49)에는 사가에서 살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궁녀들과 10책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어떻게 필사했는가는 의문점으로 남는다.3. 여담
- 정조가 쓴 《 어제의빈묘지명》에 의하면 1766년(영조 42) 무렵, 정조는 의빈 성씨에게 차였다. 그로부터 약 7년 뒤인 1773년(영조 49), 의빈 성씨가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함께 《곽장양문록》을 필사한 것을 보면, 정조의 두 여동생들과 계속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 정조의 주변인들은 소설 필사에 열정적일 정도로 소설 마니아였던 것으로 보이나, 정작 정조는 저속한 소설 문체를 싫어하여 1792년(정조 16)에 문체반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다만 《곽장양문록》의 필사 시기는 1773년(영조 49) 봄으로, 문체반정보다 20여 년 앞섰다. 그런데 효의왕후가 필사한 만석군전, 곽자의전도 남아있는 등 현재 전하는 소설책들의 필사 주체와 연대를 보면 궁중 여인들은 정조의 문체반정과 상관없이 소설을 즐겨 필사하고 읽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