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고티에 6세 드 브리엔 Gautier VI de Brienne |
|
생몰년도 | 1302년 ~ 1356년 9월 19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브리엔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 |
아버지 | 고티에 5세 드 브리엔 | |
어머니 | 잔 드 샤티옹 | |
누이 | 이자벨 | |
배우자 | 잔 드 브리엔 | |
직위 | 브리엔, 레체, 콘베르사노 백작, 아테네 공작 주장자, 프랑스 무관장 |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무관장.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으나 푸아티에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1302년경 브리엔 백작이자 아테네 공작 고티에 5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무관장이자 포르시앙 백작 위그 드 브리엔의 딸인 잔 드 샤티옹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이자벨[1]이 있었다. 1311년 3월 15일, 아버지 고티에 5세는 카탈루냐 용병을 상대로 할미로스 전투를 치렀다가 전사했다. 그는 브리엔, 레체, 콘베르사노를 물려받았지만, 아르고스와 나우플리아를 제외한 아테네 공국은 카탈루냐 용병에게 장악당했다. 1318년, 그는 아테네 공국을 탈환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이후 나폴리 왕국을 다스리고 있던 앙주 가문과 동맹을 맺기로 하고, 1325년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의 조카이며 타란토 공작 필리포 1세의 딸인 베아트리체와 결혼했으며, 장인으로부터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명목상 권리를 양도받았다. 1331년, 교황 요한 22세로부터 폭압을 일삼는 카탈루냐 용병대를 토벌하는 십자군을 일으키는 것을 허락받은 고티에 6세는 나폴리 왕국의 지원을 받고 아버지를 살해한 카탈루나 용병대에게 복수하고 아테네 공국을 탈환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브린디시에서 프랑스 기병 800명과 보병 500명을 집결시킨 뒤, 라구사 공화국으로부터 함대를 임대한 뒤 아드리아해를 건너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공격했다. 먼저 케팔로니아와 자킨토스 섬에 상륙해 주민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나폴리 왕국에 귀속시킨 뒤, 육지에 상륙한 후 아르타를 포위했다. 이에 이피로스 데스포티스인 조반니 2세 오르시니가 타란토의 필리포 1세에게 접근해 타란토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고티에 6세의 십자군 원정에 협조할 테니 군대를 물려달라고 청했고, 고티에 6세는 이에 따랐다.이후 보이오티아 북부를 통과한 뒤 아테네로 진격하자, 카탈루냐 용병대는 회전을 회피하고 테베와 아테네 성채에서 농성했다. 그는 아테네를 포위했지만, 장기간의 포위전을 지속할 자금과 병력이 부족한 데다 그리스 원주민들에게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결국 1332년 여름 원정을 포기하고 막대한 빚을 짊어진 채 브린디시로 돌아갔다. 그나마 레프카다와 보니차 섬을 공략하는 데는 성공했고, 그는 이 영토에 프랑스 출신 영주를 임명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영지를 관리하는 한편 1339년 티에라슈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던 그는 1342년 피렌체 공화국으로부터 도시를 통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피렌체는 1339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막대한 자금을 대출했으나 제대로 돌려받지 못한 데다 베로나 영주 마스티노 델라 스칼라로부터 루카 시를 탈취하려는 원정을 벌였다가 막대한 군비를 소모하는 바람에 심각한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티에 6세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피렌체를 지배하는 상인 계급으로부터 제한된 기간 동안 통치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하층 시민들은 고티에 6세 이전에 통치를 행사했던 자들의 무능함에 진저리를 치고 그해 11월에 종신 시그노르(signore: 주인)로 받들었다.
그는 피렌체의 재정난을 수습하기 위해 인두세 부과, 부유한 시민들로부터 강요된 대출금에 대한 도시의 상환 연기, 상인 계급에 대한 세금 부과 등 일련의 조치를 단행했으며, 엄격한 규율을 제정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들을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처벌했다. 그 결과 피렌체의 부채는 극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상인계급의 분노를 샀다. 그는 피렌체 지배계급이 자신을 몰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300명의 인사를 연회에 초대한 뒤 전원 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중간에 누설되었고, 지배층의 선동을 받은 피렌체 주민과 도시 수비대 5천 명이 집단 봉기해 그가 거주하고 있는 궁전에 침입했다. 결국 그는 제압당하고 10개월 만에 사임한 뒤, 목숨을 위협받자 피렌체를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1344년 외 백작 라울 1세 드 브리엔의 딸인 잔과 결혼했다. 두 부부는 잔과 마르그리트라는 두 딸을 두었으나 둘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1356년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된 뒤 그 해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그에게는 살아있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여동생 이자벨에게 상속되었고, 다시 이자벨의 남편인 고티에 3세 드 앙쟁에게 넘어갔다.
[1]
1306 ~ 1360, 브리엔 여백작, 아테네 공국과 예루살렘 왕국의 소유권 주장자. 고티에 3세 드 앙쟁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