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0:14:06

고토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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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고토 겐지
後藤健二|Kenji Goto
파일:캡처_2024_01_21_19_36_49_195.png
출생 1967년 9월 22일
미야기현 센다이시
사망 2015년 1월 31일 (향년 47세)
시리아 라카
직업 언론인
종교 개신교
가족 母 이시도 준코, 배우자 조고 린코, 자녀 3명
학력 호세이 대학 사회학부 졸업
1. 개요2. 생애3. 피랍 4. 인질극5. 고토 겐지의 음성6. 참수7. 관련 인물

[clearfix]

1. 개요

내 신변에 무슨 위험이 생겨도 나는 시리아인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책임은 저에게만 있습니다.[1]
일본의 프리랜서 언론인. IS에게 참수당해 사망한 일본인 희생자이다. 트위터

2. 생애

1967년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출생하였다. 호세이 대학 졸업 이후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에서 근무하게 된다.

1990년대 중반부터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고토 겐지는 소형 비디오 카메라를 든 채 인권, 평화 등을 테마로 중동, 북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등 험지에서 취재 활동을 벌였다. 특히 그는 분쟁 지역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거나 소년병이 되길 강요 당한 아이들의 삶을 저술과 강연으로 알리는 데 천착해왔다. 직접 촬영한 영상 자료를 활용해 일본 내 대학교와 중학교 등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분쟁 지역 아이들의 삶을 전했고, 일본 유니세프협회에도 협력해 왔다. 고토 겐지는 1997년에 개신교로 개종하고 도쿄 덴엔초후에 있는 일본 그리스도 연합 교구의 일원이기도 했다.

3. 피랍

유카와 하루나가 피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귀국하자마자 고토 겐지는 갓 출산한 아내와 아기를 두고 시리아로 향했으며, 본인이 신변에 문제가 생겨도 시리아인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영상을 업로드했다. 이후 본인이 터키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넘어가고 있으며 자유 시리아군과 함께 산길을 걷고 있다고 말하는 영상을 업로드했다. 이후 고토 겐지는 시리아에서 실종되고(피랍) 유카와 하루나와 함께 IS의 협박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고토 겐지는 시리아에서 여러번 현지 가이드를 교체했었는데, 마지막으로 동행한 가이드가 IS와 내통하여 팔아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4. 인질극

영상에는 유카와 하루나와 고토 겐지가 동시에 나왔으며, 요구 사항은 2억 달러를 달라는 금전적인 요구였다.

이 요구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유카와 하루나가 피살당했다.

유카와 하루나 참수 이후 알 리샤위 석방으로 요구가 변했다.


해당 협박 영상에서 고토 겐지가 눈을 비정상적으로 자주 깜빡거려서 제레미아 덴튼처럼 모스 부호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다. #

5. 고토 겐지의 음성

유카와 하루나 참수 이후 고토 겐지가 유카와 하루나의 시신 사진을 들고 있는 사진에 음성만 있는 영상을 IS가 업로드했다.


유카와 하루나 참수 이전에는 인질 몸값으로 2억 달러를 요구했지만 요구 사항이 달라졌다. IS 동료인 사지다 알 리샤위[2]를 석방해 달라는 요구였다. 알 리샤위를 석방하면 고토 겐지 본인도 석방될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다른 인질과는 다르게 직접 말하는 영상이 아닌 음성밖에 없어서 저걸 말하는 사람은 고토 겐지가 아닌 다른 IS 대원이고 고토 겐지인 척 속여서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다.

일본 정부는 고토 겐지 구출을 위해 요르단 정부와 협상에 들어갔다.

이후 고토 겐지의 마지막 음성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


일본 정부가 요르단 정부에 압력을 가해서라도 알 리샤위를 석방하라는 내용이였다. 시간을 더 지체하면 본인과 요르단 조종사가 살해된다는 내용이다.
<IS의 고토 겐지 마지막 음성 주장 영상 중에...>

나는 고토 겐지이다.

일본 사람들과 일본 정부에 대한 메시지이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메세지이다.

요르단 정부가 알 리샤위 사형수의 석방을 늦추고 있어 나의 석방도 늦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요르단 정부에 모든 정치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

시간은 이미 흘러가고 있다.

나와 그의 교환이다. 무엇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가?

사지다는 10년 동안 복역하고 있지만 나는 겨우 몇 달 갇혀 있다.

맞교환하자.

요르단 정부가 더 이상 늦출 경우, 조종사 사망의 책임은 요르단 정부에게 있을 것이다.

그 후 나도 죽을 것이다.

나에게는 24시간밖에 없다.

조종사는 나보다 더 짧은 시간이 남았다.

어떻게든 우리를 죽지 않게 해 주었으면 한다. 이 이상의 시간을 지연한다면 우리가 죽을 뿐이다.

공은 지금 요르단 측에 있다.
이후 요르단 조종사는 화형을 당하고 고토 겐지는 참수당해 사망했다.

6. 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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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 당하기 직전의 고토 겐지.

결국 협상은 성사되지 못하고 사막에서 고토 겐지를 참수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처음 업로드 되었다. 현재로서는 고토 겐지의 정확한 참수 날짜를 알 수 없다고 한다.[3] 지하디 존은 고토 겐지의 턱을 붙잡고 참수를 하려던 장면이 나오다가[4] 갑자기 검은 화면이 나오더니 참수 된 후의 고토 겐지의 사진이 나오면서 영상은 끝난다. 고토 겐지가 참수 당하는 장면은 편집을 했기 때문에 영상에 안 나온다. 고토 겐지가 참수 당한 후에는 유족인 어머니 이시도 준코가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오열하는 모습이 방송에 생중계 되기도 했다.

7. 관련 인물



[1] 피랍 당한 유카와 하루나를 구하러 갔을 때 했었던 발언. [2] 요르단 수도에 있는 호텔에서 폭탄 테러를 시도했지만 알 리샤위의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결국 잡혀서 감옥에 수감된다. [3] 지하디 존은 고토 겐지를 참수 하기 전에 성명문과 비슷하게 육성이 들리는 데 "아베, 이 칼은 겐지 뿐만 아니라 너희 온 국민들을 겨냥한다. 일본의 악몽이 시작될 것이다."라고 발언 한다. [4] 이때 고토 겐지는 참수 당할 때 큰 비명 소리나 몸부림을 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계속 꽉 감고 있는 채로 참수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