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의 랜드마크인 로마 시대 극장
인근 랜드마크인 함맘 데바그. 함맘 셸랄라 / 메스쿠틴/ 울레드 알리 등으로도 불린다
1. 개요
아랍어 ڨالمة 베르베르어 ⴳⴰⵍⵎⴰ
영어, 프랑스어 Guelma
알제리 북부의 도시. 구엘마, 칼마 등으로도 불린다. 콩스탕틴에서 동쪽으로 70km, 안나바에서 서남쪽으로 50km, 수카하라스에서 서북쪽으로 40km 떨어진 와디 세이부세 남안에 위치한다. 서쪽의 산지와 동쪽의 농경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인구는 13만명이다. 시가지 북부 도심에는 로마 시대 극장이 있고, 남부에는 1945년 5월 8일 대학교가 자리한다. 1924년에 창단된 축구팀 ES 구엘마의 연고지이다. 서쪽으로 12km 떨어진 '알제리의 파묵칼레' 함맘 데바그 (حمام الدباغ)에는 아프리카 최대의 노천 열탕이 있어 관광객을 모은다. 다만 수온이 96도에 이르기에 온천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2. 역사
2.1. 고대
바다에서 80km 떨어진 내륙임에도 페니키아 시대에 도시가 세워졌고, 당시 지명은 소금을 의미하는 말라카였다. 이는 로마 제국기의 칼라마로 변질되었고, 다시 아랍식인 구엘마로 와전되었다. 따라서 겔마라는 지명은 스페인의 말라가와 같은 어원이다. 칼라마는 트라야누스의 치세에 무니키피움이 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비비아 아울렐리아 사비나가 후원하였다. 그무렵 칼라마는 콜로니아 (식민도시)로 승격되었고, 시티페스 ( 세티프)와 함께 누미디아 지역의 주요 곡창 지대로써 번영하였다. 기독교화 후 5세기의 칼라마 주교 포시디우스는 인근 타가스테 (수카하라스) 출신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전기를 저술하였다. 반달족의 정복 후 포시디우스는 히포 ( 안나바)로 피신한다.
2.2. 중세 ~ 현대
반달 왕국을 거쳐 일대를 수복한 동로마 제국의 총독 솔로몬은 539-44년 칼라마에 성채를 세웠다. 이슬람 정복 후 구엘마로 불리게 된 도시에는 9세기경 바누 힐랄 베두인들이 정착하였다. 오스만 제국을 거쳐 1834년 프랑스가 점령하였고, 2년 후에는 그 군사기지가 세워졌다. 1854년에는 옛 로마 성벽을 재건하여 그를 경계로 한 새로운 도시가 세워졌고, 1905년에는 로마시대 극장이 복원되어 관광지가 되었다. 프랑스령 알제리 시기 겔마에는 많은 유럽인 ( 피에 누아르)들이 정착하였고, 1945년 5월 프랑스 경찰이 현지인 시위대에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있었다. 1986년에 세워진 겔마 대학교의 정식 명칭은 해당 사건을 기리는 1945년 5월 8일 대학이다.
3. 갤러리
3600명을 수용 가능한 3세기의 극장
로마 시대부터 목욕탕이 세워진 데바그 열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