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대한민국 사적 | |
<colbgcolor=#315288> 강화 홍릉 江華 洪陵 Hongneung Royal Tomb, Ganghw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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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경북 경주 921-1번지 외, 교동 274 등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려시대 | |
수량/면적 | 31,415㎡ | |
지정일 | 1971년 12월 29일 | |
시대 | 고려 고종 46년( 1259) | |
소유단체 | 산림청 등 | |
관리단체 | 강화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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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 강화 홍릉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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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3대 왕 고종의 릉이다.고려왕릉의 대부분은 북한의 개성시 인근에 있지만,[1] 고종은 여몽전쟁기에 강화도로 천도한 시대의 군주인 탓에 그의 능침도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소재하고 있다.
1971년 12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2]
2. 내용
홍릉은 남한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려 왕릉이긴 하지만,[3] 고려가 가장 어렵던 수십년간의 전쟁과 무신정권으로 왕권이 땅에 떨어진 시대였기에 고종이 꽤 오래 재위한 왕임에도 왕릉은 규모도 매우 작고 초라한 편이다. 또한 주변의 문무인으로 추정되는 동상이 2쌍식 조성되어 있고 그 옆에는 홍릉의 난간석이 모여져있다.3. 위치
고려산 중턱쯤에 있어서 경사가 심하며 인적도 드물다. 왕릉 올라가는 길에는 캠핑장이 설치되어있는데 관리가 잘되어있지 않다.4. 외부 링크
5. 사적 제224호
홍릉은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무덤이다.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4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고려고종홍릉 → 강화 홍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4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고려고종홍릉 → 강화 홍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