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역배우에 대한 내용은 강지석(2008) 문서 참고하십시오.
|
|
<colbgcolor=#0047a0> 출생 | 1894년 12월 3일 |
전라남도 무안군 | |
사망 | 1953년 3월 16일 |
전라남도 목포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3.1 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1999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2. 생애
1894년 12월 3일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태어났다.3.1 운동이 일어난 후 무안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한근이 3월 9일 관련 소식을 전하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강지석은 1919년 3월 19일 밤 김순기의 집에서 정순홍, 박상규 등 수십 여 명과 함께 무안읍 장날인 20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들은 밤새도록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며 만세시위를 철저하게 준비하였다.[출처]
만세시위가 일어나기로 한 당일 이들은 읍내 곳곳에 독립선언서와 경고문을 붙였다. 이를 톨해 그들은 일제와 친일파들의 자숙과 군중들의 궐기를 촉구하고 나섰다. 11시 경, 강지석 등은 남산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한 다음 읍내를 향해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 경, 그들은 무안공립보통학교 앞을 지나며 주재원들에 의해 저지를 받았으나 행진을 이어나갔고 구무안읍 장터에 도착하였다. 읍내 장터에는 이미 수백명의 군중들이 만세운동을 위해서 집결되어 있었다.[출처]
주도자들은 그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였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오후 2시경 만세시위의 규모는 500여명으로 늘어났다. 모두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고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고조되어 갔다. 이에 일제는 만세시위를 탄압하기 위해서 무안군수와 목포경찰서장이 중심이 되어 군경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시위를 주도한 자들을 검거하였다. 강지석도 이 과정에서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 해 4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강지석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이후 그는 1953년 3월 16일에 사망하였다.[출처]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