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강대규(康大奎), 강팔금(康八金) |
본관 | 신천 강씨[1] |
출생 | 1907년 6월 26일 |
충청남도 공주군 신상면 창촌 (현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 창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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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1년 3월 18일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용두동 서울특별시 동부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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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범진은 1907년 6월 26일 충청남도 공주군 신상면 창촌(현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 창말)에서 아버지 강문경(康文璟)과 어머니 달성 서씨 서상순(徐相順)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홍성군 광천면 광천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다.그는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만주로 망명해 대한독립군에 가담하여 하사로 복무했으며, 이후 진급을 거듭해 1931년 대한독립군 준위가 되었고, 1932년에 소위로 진급했다.
그는 얼마 뒤 중국 항일구국군 총사령부 특무 소위로 부임했으며, 그해 2월 헤이룽장성 퉁허현(通河縣)[2]에서 중국군과 합작해 일본군과 대항했다. 그러나 마잔산(馬占山)[3]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이는 만주국군에 투항하면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곧 신의주로 압송되어 1933년 3월 2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그는 1935년 만기 출옥한 뒤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국민혁명군 29군 지하공작대에 입대, 정보임무 담당으로 복무하던 중 1944년 또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이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2가에서 말년을 보내던 그는 1981년 3월 18일 동대문구 용두동 서울특별시 동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강범진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88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