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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호/선수 경력/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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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호의 선수 경력
통합 선수 경력: 강민호/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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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No.47
강민호
姜珉鎬 | Kang Min-Ho

1. 개요2. 2004 시즌3. 2005 시즌4. 2006 시즌5. 2007 시즌6. 2008 시즌7. 2009 시즌8. 2010 시즌9. 2011 시즌10. 2012 시즌11. 2013 시즌12. 2014 시즌13. 2015 시즌14. 2016 시즌15. 2017 시즌

1. 개요

강민호의 롯데 시절 성적을 정리한 문서

2004년 신인드래프트 2차지명 3라운드 전체 17번으로 롯데에 입단, 2017년 FA 때 4년 총액 80억+10억원을 받고 삼성으로 이적할 때까지 롯데에서 뛰었으며 롯데 자이언츠 최다 경기 출장의 기록을 갖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에 있을 당시 최고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활약하였으며, 국가대표 포수 최다 차출인 8회로 국가대표 포수로 이름을 떨쳤다. 이대호의 해외진출 이후 강민호 본인이 삼성에 이적하기 전까지 어느 야구팬에게 강민호하면 롯데, 롯데하면 강민호라는 인식이 있을만큼 부산 출신이 아니지만 부산의 아이돌이자 롯데 자이언츠의 간판 선수로 활약했다. 대구에서 이승엽이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대공원역 안내 방송에 나오듯, 부산 도시철도 3호선 사직역 안내 방송은 강민호의 몫이었다.

팬들에게 인기가 좋았으며 젊은 나이부터 Rivers of Babylon을 개사한 '롯데의 강민호~ 롯데의 강민호~ 오오오오~ 오오오오~' 라는 전용 응원가를 보유했다.[1]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 중 한명이었다.[2]

[3]
데뷔 초에는 타격은 나름대로 쓸 만하다고 평가되었으나 수비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가끔씩 도루 잡는답시고 2루로 던지다 중견수까지 날아가는 등 희한한 광경을 자주 연출하곤 했으니... 시즌 초반에는 괜찮다가도 시즌이 진행되면서 체력적인 문제인지 블로킹에서 실책이 특히 심해져 공을 빠뜨리거나 놓치는 일이 눈에 띄기도 했고, 거기에 단순한 볼배합으로 맨날 까이기도 했다. 또한 어린 나이에 주전을 맡아서 그런지 분위기에 잘 휩쓸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각성된 이후엔, 젊고 공격력이 뛰어난 20대 포수라는 특징으로 강민호를 최고의 인기 선수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반대로 위와 언급된 것과 같은 정신줄 놓은 플레이들 또한 종종 보여주기에 까이는 정도도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갈매기 마당에서. 오죽하면 박세웅 ↔ 장성우 트레이드가 터진 2015 시즌 당시 강민호가 커리어 하이 급으로 성적을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감독 이종운 보고 장성우 쓰라는 사람이 있었을 지경이었다.

타격 부분에서 타율, 출루율, 장타율, 홈런, 타점 등 공격 전 부문에서 매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왔으며[4] 2008년부턴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로 차출되고 커리어 최초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게 되면서 리그 정상급의 포수가 되었다.

그러나 2013년, 2014년에는 공격력에서 상당한 슬럼프를 겪었다. 뇌진탕 부상 후유증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대신 그동안 약점으로 불리었던 수비 측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2014 시즌에 죽도록 욕을 먹고 타격폼을 수정하고 나서 2015시즌부터는 공격력이 살아나다 못해 역대급 공격형 포수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게 된다.

2. 2004 시즌

롯데에 처음 입단할 때만해도 롯데 자이언츠는 강민호에게 가기 두려웠던 팀이라고 한다. 당시 프로야구의 인기는 많이 죽어있었고 팀 성적도 좋지 않았으며 관중석에 있는 관중 수보다 쓰레기 통의 수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사실 강민호는 고교 야구선수였음에도 한국 프로야구 선수나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이름을 두 세명 정도밖에 모르고 경기 대신 가요톱텐을 즐겨봤을 만큼 프로야구와 롯데 자이언츠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학교 선배였던 최준석 박종윤이 있어 가면 잘해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 정도만 있었다. 프로입단 첫해인 2004년엔 겨우 3경기만 출전하였다. 이 때만 해도 지금처럼 성장할 줄 몰랐던 사람이 대다수였고 강민호 스스로도 이 팀이 자신의 운명의 팀이 될 줄 몰랐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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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호의 신인 시절.[5]
오른쪽 선수는 1년 선배인 김만윤.[6][7]

강민호가 주전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운+노력이 뒷받침되었다.

3. 2005 시즌

2004 시즌이 끝나고, 주전 포수였던 최기문이 병역 문제로 시즌을 날려먹었고, 재검 후 면제를 받고 돌아왔지만 2005년 스프링캠프를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양상문이 눈을 돌린 것이 신인 포수 강민호였던 것. 최기문은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풀타임을 소화할 능력이 되지 못하게 되었기에, 양상문 당시 롯데 감독은 신인급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며 경기 경험을 쌓게 했다. 롯데가 손민한 등 노련한 투수가 등판시에는 포수 강민호를, 장원준 같은 신인급 투수를 등판했을 때 최기문을 포수로 내보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 어쨌든 사실상의 데뷔 시즌을 100경기 넘게 출전하면서 경험치를 쌓았다.

4. 2006 시즌

그러다 전년도의 부진을 만회하려던 최기문이 2006년 스프링캠프 때 의욕을 앞세워 훈련하던 도중 팔꿈치 부상을 당하며 시즌 아웃이 되었고, 강병철 당시 감독은 강민호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맡겼다. 그리고 이 시즌 포수로서는 역대 3번째로 전 경기 출전의 위업을 일궈냈다. 포수로서 아직 설익은 기량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플레이하는 모습과, 방망이에서도 .251의 타율과 9홈런 53타점으로 역대급 투고타저 시즌임을 감안하면 꽤나 쏠쏠한 모습을 보여줘 롯데 팬들의 호감을 샀다. 사실상 강민호의 야구인생을 통틀어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해.

5. 2007 시즌

전해와 마찬가지로 한 경기도 빠지지않고 계속 선발 출전을 이어갔고 '이러다 2년 연속으로 전 경기에 출전하는 포수가 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결국 강병철 감독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끊기 위해 한 경기를 결장시켜 전 경기에서 딱 한 경기 모자란 125경기에 출전했다. 이 시즌 이대호와 함께 두 자릿수 홈런(16개)를 쳤다. 2008년에는 거의 3할에 육박하는 타율과 20개 가까이 홈런을 쳐 더욱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포수로서의 재능보다, 타자로서의 재능이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팬들의 반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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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엔 포수로서 전 경기 출장의 대기록을 만들었고, 2007년 연속경기 출장 기록을 끊는 것을 즐기는 강병철 감독의 배려로 기록은 중단되었지만 딱 한 경기가 모자란 125경기 출전. 하지만 포수로서의 연속경기 출장 기록은 체력을 무한정 잡아먹는 일이기에, 06시즌에 그만큼 롯데에 포수가 부족했다는 걸 말해준 사례. 최기문의 부상으로 대신 나올 포수가 없었을 정도니... 이러한 점은 2008년에도 4경기만 결장한 122경기를 소화하고 포수로 유일하게 수비 1000이닝을 넘겨 내외적으로 가장 체력을 요하는 포지션인 포수인만큼 혹사 논란이 있었다.

6. 200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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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수상자 (2008)

사실 08시즌부터는 공격면에서는 그해 최고의 포수였지만, 수비면에서 뭔가 좀 불안한 모습을 보여, 1루수 지명타자 전향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수비 문제는 이원석이 홈런 치고도 두산 베어스 벤치에서는 당연한 거라고 칭찬도 안 해줬다 할 수준. 항상 똑같아 팬들조차 순서를 외우는 국민 볼배합으로 롯데 팬들의 속을 이리저리 긁은 적도 있었다.[8]

그리고 이걸 부채질한 것이 이성득 KNN 해설위원이었다. 이 때문에 이성득과 연이 깊은 갈매기 마당, 일명 갈마를 중심으로 장성우 주전 포수론이 크게 힘을 얻기 시작했다. 반면 갈마에 학을 뗀 다른 야구팬들이 강민호에 대한 쉴드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하기도 했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나 카림 가르시아의 경우와 완벽하게 같은 양상. 앞서 언급한 선수들이나 롯데의 성적이 괜찮게 나오면 갈마가 밀리고 아니면 반대 양상으로 흐른다. 사실 위기 순간에 직구를, 특히 몸쪽으로 빠른 직구를 자주 요구하기 모습을 보이는 것에서 볼 때 문제가 좀 있다. 덕분에 커브볼 위주로 승부하는 롯데 팀 안의 최향남, 염종석 같은 노장 투수들 하고는 궁합이 매우 나쁘다. 하지만 가끔 이런 장면도 나온다. # 어쨌든, 2008시즌은 타율 0.292, 홈런 19, 타점 82, OPS 0.850으로 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여, KBO 포수 중에서는 가장 좋은 타격 성적을 올려 KBO 골든글러브에도 선정되었다. 또한 김경문호에 발탁, 2008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에 참가했다.

7. 2009 시즌

2009년 시즌 이후로는 포수 리드는 답이 없고 기본적인 포구나 블로킹, 미트질도 전혀 발전이 없으며 열심히 뛰지도 않는다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열심히 까였다. 실제로 강민호가 나가고 최기문이 들어왔을 때에는 점수를 거의 내주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롯데의 성적이 전반적으로 하락세였기 때문이라는 평도 존재한다.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포수 방어율이라는 것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많다. 본인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홈런을 맞고도 약한 리액션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뭔 일이 생기면 일단 강민호부터 깐다. 이렇게 까여도 꾸준히 나온 것은 제리 로이스터 감독 및 프런트의 총애를 받기도 하고, 어린 포수를 키우는 건 구단 차원의 의지이기 때문. 노련하지만 체력적인 문제 때문에 30대 후반의 최기문을 풀타임 주전으로 낼 수도 없고, 초고교급 포수 유망주인 장성우도 아직은 경험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 강민호가 정말로 장기적인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강민호가 주전 마스크를 쓸 것이다. 타격이 포수 3명중 가장 뛰어나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시즌 중 계속 팔꿈치 통증을 호소했고, 미국 LA까지 가서 검진을 받은 결과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발견되어 재활 치료를 하고 다시 복귀했지만, 얼마 못 가 다시 통증이 생겨 시즌이 종결되기 전인 9월 8일부로 시즌 아웃되었다. 수술을 받을 경우 2010년 후반기 들어서야 돌아올 수 있다는 예상과 함께, 그를 대신해 마스크를 쓴 장성우가 뛰어난 활약을 펼쳐 팀은 잘 나가도 본인은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미묘한 입장이다. 이것은 백업요원 2명이 멀쩡히 버티고 있음에도 몸이 성치않은 강민호를 계속 기용한 로이스터 감독의 잘못이 매우 크다고 밖에 볼 수 없다. 09시즌은 부상때문에 83게임(301타석)에만 출장했지만, 타율 0.260, 홈런 9, 타점 30, OPS 0.758의 성적을 올렸다.

8. 20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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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회복 후 지나치게 일찍 출장시켰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5월 들어서 타격 포텐셜 대폭발. 최근 몇년간 KBO 주전 포수 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공격력을 소유하고 있고, 거의 웬만한 1루수나 지명타자 뺨치는 타격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수비 능력(블로킹 능력, 포구 능력)에 대해서는 09시즌과 비교해 좀 떨어진 듯하다. 더불어 도루 저지도 09시즌의 부상때문인지 꽤 악화된 편으로 경기를 보다보면 도루 저지를 한답시고 던지는 공이 베이스 커버 들어온 유격수나 2루수가 점프해야 잡을수 있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덕분에 팀이 연패에 빠질때에는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 갈매기 마당등의 게시판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까이고 있는 중. 1루수, 지명타자 전향설은 여전하다.(문제는 수비 안되는 타자가 롯데에 너무 많다는 거지만.) 단, 볼 배합에 대해서는 09 시즌보다 좀 더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 팀별 타자들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듯. 하지만 감독이 좀 심할 정도로 몸쪽 승부를 주문하는데다 팀의 투수들이 선발을 제외하고는 거의 막장 상황인지라 별 효과가 없다는 것. 실제로 롯데와의 경기에서 결승타를 친 타자들은 몸쪽을 예상했다고 하는 기사들이 종종 나오는걸 보면 아직은 좀더 보완이 필요한 듯.

문제는 10시즌 롯데 투수진이 단체로 양상문 투수코치의 효과에 의해 전체적으로 배팅볼 투수급으로 전락하는 바람에… 효과를 못 보고 있는 중.

팀 내에서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고있는지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이 발벗고 나서 강민호를 지지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정훈 장원준 모두 호투 뒤 강민호를 칭찬했고 지금 포수는 아니지만 한때 두산에서 포수로 뛰었던 홍성흔도 인터뷰에서 강민호의 볼배합 문제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언급했다.[9] 세부적인 볼배합이나 포수 리드는 포수에게 맡기던 롯데 코칭 스태프도 이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양.

스토브리그 때, 장성우 김태군이 함께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장성우는 롯데는 사인을 100% 포수가 낸다면서, 투수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기본적인 데이터 수집은 구단에서 하지만 현장에서의 포수 리드는 포수가 맡는 모양. 또 강민호가 못할 때마다 카메라가 장성우를 비춰준다.

4월말 SK전에서 김성근 감독이 "요즘 연구를 많이 하는 모양이다. 포수 리드가 계속 변경된다. 좋아졌다."라고 강민호를 칭찬했다.

5월 들어와서는 0.347의 타율과 더불어 6홈런, 15타점을 쳐내며 홈런을 좋아하는 로이스터 감독을 기쁘게 하고 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작년에 수술한 부위에 이상이 생겨서 5월 21일 결장을 했지만 다시 출전중. # 생각해보면 예정된 결과인 게 수술할 때만 해도 10시즌 후반에 나올 수 있다고 했던 선수가 정규시즌 개막과 동시에 계속 주전으로 출전했으니 당연한 것.

6월 1일 LG전에서 번트 타구를 3루수에게 송구한다는게 좌익수에게 송구해버리는 엄청난 실책을 저질러버려 폭풍같이 까이며 로이스터 감독과 더불어 역적이 돼버렸다. #

6월 5일 삼성전에서 만루홈런 1개 포함 4타수 2안타 4타점으로 활약였다. 10시즌에는 장원준 선발 때 자신의 타점 중 거의 절반(33점중 16점)을 올렸다. 샤다라빠는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 ' 내만봐라'라는 만화를 남겼다. 5월 이후로 타격 페이스는 매우 좋아서 5~6월 동안 10홈런, 32타점을 기록했다.

그런데 작년의 팔꿈치 부상이 다시 도졌는지 6월 15일 삼성전에서 교체됐고 그 다음날인 16일 경기에도 결장했다. # 자칫 잘못하면 09시즌 처럼 또 시즌아웃될 수도 있는 상황. 일단 미국에서 수술을 집도한 박사는 괜찮다고 한다. # 일단 6월 19일부터 다시 출장하고 있으나 부상이 완치가 된 것이 아닌지 27일 SK전에서 4회초에 교체되었다.

8월 주초 경기에는 팔꿈치 통증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중간에 부상으로 휴식을 한 탓인지 8월 들어 출장한 경기에서는 실망스러운 모습들이 나오고 있다. 8월 7일 경기에서는 팀도루 꼴찌인 한화에게 6개의 도루를 폭풍같이 헌납하며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 대차게 까였다. 이 경기전까지 한화의 팀 도루는 75개로 성공율도 61%였다. 게다가 이날 도루의 3개는 2루에서 3루로 가는 도루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한화 타자들이 대놓고 뛰었다. 다음날인 8일에는 올시즌 도루가 하나도 없는 장성호마저 뛰었다. 물론 이때는 다행히도 잡았다.

8월 8일 경기에서는 투수 교체를 하러 올라온 로이스터 감독이 강민호를 향해 화를 내는 장면까지 잡혔다. 친목질 관련으로 아래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경기를 이긴 후 로이스터 감독과 친목질을 하는 유일한 선수가 강민호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8월 15일 KIA전에서도 김선빈에게 1루에서 2루 도루를 허용하고 다시 2루에서 3루 도루를 막을려고 송구한 게 악송구가 되는 바람에 실점.

시즌 정규시즌 기록은 타율 0.305, 홈런 23, 타점 72, OPS 0.901로 롯데의 막강 클린업의 한 축을 도맡았다.

10월 5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준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팀이 3:9로 지던 6회말 2사 1, 3루 상황에서 1루주자 용덕한 도루를 저지하기 위해 2루로 송구를 했으나 2루에 야수가 없었다! 당연히 공은 중견수 쪽으로 데굴데굴 굴렀고 3루 주자는 여유 있게 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이는 포수 에러로 기록되었고 또 한 번 강민호는 폭풍같이 까였다. 이 실책을 본 하일성 해설위원의 이게 뭔가요!는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실수인지를 말해준다. 물론 베이스커버를 하지 않은 유격수 황재균이나 2루수 조성환도 까일 여지는 충분했지만, 야수를 향해 던졌거나, 최소한 던지지 않았다면 3루주자가 홈으로 들어올 일은 없었다.
이날 강민호는 선발 포수 겸 6번타자로 출장하여 4타수 2안타 1홈런 1타점 1득점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4:11로 대패하였다.

준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포수 겸 6번타자로 출장하여 18타수 5안타 1홈런 1볼넷 2사구(死球) 4타점 2득점, 타율 .278, 장타율 .444, 출루율 .381를 기록했고, 팀은 2연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9.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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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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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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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1차 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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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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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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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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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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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수상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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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2차 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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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다들 이불 개고 밥 먹어'로 코믹하게 개사해 널리 알려진 노래. 근데 사실 이 노래는 성경 관련, 바빌론 강가에서 슬피 울었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2014년부터 SBI저축은행에서 바로 아래 나올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와 같이 광고 BGM으로 쓰기도 한다. ' 모텔에 간민호~ 모텔에 간민호~ 505호~ 505호'라고 들리기도 한다. 올림픽,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등 국가 대항전에선 전용 응원가 가사가 한국의 강민호로 바뀌기도 한다. [2] 유니폼도 강민호 유니폼이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 [3] 그의 인기를 보여주는 영상. 2011년 부산락페스티벌에서 강민호의 등장곡인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가 등장하자 "강민호"를 외치는 사람들. [4] 박경완과 같은 노장 포수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한다는 전제 하에 강민호가 엄청나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예를 들자면 옆 나라의 죠지마 켄지처럼. [5] 등번호는 입단 첫해였던 2004년에 40번, 2005년부터 47번을 달았다. 등번호 47번의 의미는 임수혁이 선수시절 날린 개인 통산 홈런 갯수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영상 40초부터. [6] 2004년 초 윤재국을 두산으로 보내고 현금 7,000만원과 함께 영입했다. 2004년 10타수 3안타를 기록한 것 외의 1군 기록은 없으며, 최형우, 최진행 등과 함께 경찰청 야구단 창단 멤버이기도 하다. 군 제대 후인 2008년을 끝으로 은퇴했고 KIA 스카우트와 롯데 전력분석원으로 일하다가 2016년 현재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아시아 지역스카우트를 맡고 있다. [7] 김주찬을 닮아서 김주찬이 아니냐는 글도 있었다. [8] 이런 반응은 08년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또 다른 초고교급 포수 유망주 장성우 때문이었는데 포수를 1차 지명할 정도라면 구단에서 얼마나 장성우를 기대하고 있는지 보여주어서 팬들도 장성우가 개쩌는 유망주인가보다!하고 생각했다. [9] 사실상 롯데에서는 포수로 나온 적이 없기 때문에 롯데 포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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