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강해파(康海波), 강중진(康中鎭) |
본관 | 신천 강씨[1] |
출생 | 1905년 10월 28일 |
함경남도
덕원군 적전면 당상리[2] (현 강원도 원산시 적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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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2년 3월 26일 |
함경남도 원산부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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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강기덕은 그의 5촌 당숙이다.
2. 생애
강규진은 1905년 10월 28일 함경남도 덕원군 적전면 당상리(현 강원도 원산시 적천동) 14-1번지에서 아버지 강기전(康基銓)과 어머니 엄씨(嚴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924년 3월 1일 원산 보광학교(保光學校) 재학 중 3.1 운동 5주년을 기념하는 시위를 주도하며 보광학교와 원산역 주변 번화가에서 격문을 살포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24년 5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조선일보 원산지국을 경영한 강규진은 1927년 12월 26일 함남기자연맹 주최로 함남기자대회를 추진하다가 일본 경찰이 이를 금지하자 이에 반감을 품고 '경찰탄핵연설회'를 개최해 시위 행진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1928년 12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공무집행방해죄로 금고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옥 후에도 계속 조선일보 원산지국장으로 있으면서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다가 1942년 3월 26일에 사망해 고향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강규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기타사항 (강규진 친손자 강귀현 작성 글)
독립운동가이자 신문기자였던 강규진(奎鎭)은 1905년 3월 26일 함경남도 덕원군 적전면 당상리 14-1번지에서 아버지 강기전(基銓)과 어머니 엄씨의 둘째 아들로 출생.함경남도(咸鏡南道) 덕원군(德原郡) 적전면(赤田面) 당모루(당상리, 당중리, 당하리)는 지금은 원산시에 속해 있으며, 고구려 시기에는 천정군 또는 을직군이라고 불렀고 신라 때에는 정천군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그 후 고려 시기에는 용주라고 부르다가 고려 성종 14년(995년)에는 의주라고 불리어집니다. 이후 조선 태종 때에는 여기에 도호부를 개설하였고, 태종 13년(1413년)에 의천으로 불리다가 세종 19년(1438년)에 와서 태조의 4대 선조의 고향이므로 德(덕)의 根源(근원)이라는 의미로 덕원(德源)이라 호칭
강규진이 태어난 당상리 14번지 바로 옆인 12번지에는 3.1운동 48인이자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 학생대표였던 강기덕(康基德)선생이 태어나신 곳이기도 함
이곳 덕원군 적전면 당모루(당상리, 당중리, 당하리)가 곡산을 별관으로 하는 신천 강씨들이 모여 살던 신천 강씨들의 세거지였음
원산 출신 작가 최호철은 당모루에 살던 민족주의 계열의 강씨와 사회주의 계열의 박씨가 해방 이후 공회당에 모여 격한 토론을 벌였다고 인터뷰함
강규진은 1924년 3월 보광중학교 (현재,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에 강기덕이 운영하는 원산시 석우동 덕흥인쇄소에서 3.1절 만세 운동 5주년을 기념하는 독립운동 전단을 만들어 동료학생들과 원산시내를 돌며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이에 일본 군경에 피체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음
일본 외무성 기록 중 국외 독립운동을 보고한 자료를 보면, 위 사건이 일어나기 몇달 전에 이미 간도의 사관(士官)양성소인 일심학교 교수로 참여하였고, 그 이후 1926년에는 원산노청집행위원회, 원산청년회혁신위원회 등에 참가하며 사회운동을 하게 됨
그러다가 1927년 12월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열린 함남신문, 잡지사 기자대회(일명, 함남기자연맹사건)에 참석하여 재만동포 구출문제에 관한 건의 수 개항을 토의하고자 하였으나, 고원경찰서로부터 치안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하여 모임을 금지 당하자, 경찰과 충돌하였다가, 체포되어 1928년 2월 징역 8월의 형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29년 2월 기각판결을 받고 형무소에서 실형을 살게 됨
강규진은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이름하여 강규진 참화사건을 스스로 만듬
강규진은 만주와 러시아로 망명해서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친구에게 자신이 강도에게 피살당했다고 거짓기사를 동아일보에 싣게 했으나, 몇년이 지나 몰래 원산으로 잠입하여 체포된 사건임
이후 원산에 있던 전주 이씨 가문의 복字 길字 여사와 1933년 결혼하여 이후 슬하에 홍찬, 홍신, 홍일, 홍해 4자매를 두고, 원산의 조선일보 지국장으로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을 함께 하며 국내에서 신문기자로써 언론활동을 통해 민족 정기를 고양(高揚)하는 독립운동을 전개
강규진선생이 돌아가신 후 원산지역의 많은 저명인사 분들이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자 권유하셨지만 이복길여사께서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루기를 원하셔서 선산인 강윤성(조선 태조 정비, 신덕왕후의 아버지)의 릉인 고릉 옆의 한 자락에 묘를 마련해서 장례를 치렀다고 함
정부에서는 강규진의 사망 후 40여년이 지난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여 독립운동 공훈을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