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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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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7년 12월 29일
황해도 송화군 연중면 온수리
(現 황해남도 송화군)
사망 1946년 9월 22일 (향년 58세)
미군정 경기도 제물포
(現 인천광역시)
본적 황해도 평산군
(現 황해북도 평산군)
본관 회산 감씨
학력 신흥보통학교 (졸업)
종교 유교( 성리학)
북서(北瑞), 동진(東津)
직업 독립운동가[1]
서훈 대통령표창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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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독립운동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1909년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연결된 친일 단체 ‘13도민중대표임시회의소(十三道民衆代表臨時會義所)’에서 황해도 지역 사무를 담당하였다. 이후 1910년 신민회에 가입하고 이후 독립투사를 양성하는 무관학교의 설립에 필요하 자금모집과 이주민 모집에 참여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웠으나 1923년에는 친일 단체인 국민협회(國民協會)의 간부직을 맡으며 활동하였으며 1923년 5월 평남지부장, 6월 황해(黃海)지부장에 선출되었다. 이후에도 1924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의 사리원(沙里院)지국장과 사찰원으로 겸무하였고, 1927년에는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사무국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는 활동을 지속하여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래 행적에서도 나오듯이 반복되는 친일 행위를 하였기에 많은 비판이 있으나 신민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것 또한 사실이므로 이것이 인정되어 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이것으로 인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게 되었다.

건국훈장은 종래 건국공로훈장이라고 불리다가 1967년 상훈법 개정에 따라 건국훈장으로 개칭되었으며, 건국공로훈장 중장, 복장, 단장은 각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국민장으로 간주되었다〔구 상훈법(법률 제1885호) 부칙 제2항〕. 이상의 3개 등급뿐이던 건국훈장은 1990년에 제3등급인 국민장이 독립장으로 개칭되고, 제4, 제5등급인 애국장, 애족장이 추가되어 5개 등급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종래 건국포장이나 대통령표창을 받았던 사람에게는 재심사를 거쳐 건국훈장 애국장, 애족장 또는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감익룡은 친일 행위도 인정되어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국민장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는데, 1990년 건국훈장이 제4, 제5등급인 애국장, 애족장이 추가되어 기존의 건국포장이나 대통령표창을 받았던 사람도 재심사를 거쳐 건국훈장 애국장, 애족장 또는 건국포장을 수여받을 수 있었는데, 1977년 대통령표창을 받아 재심사를 받았고, 신민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것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제5등급인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건국훈장이 5등급까지 늘어나면서 특혜를 본 케이스로 볼 여지가 있다.

2. 생애

1887년 12월 29일 평안남도 상원군(祥原郡) 곡정면에서 태어났다. 1907년 4월 황성신문사의 신진부(新進部)에서 활동하였고 1909년 5월에는 서북학회(西北學會)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등 언론과 학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9월 대한제국 당시 송화군(松禾郡)의 지방위원을 맡았고 친일 인사 윤대섭(尹大燮)이 중심이 되어 만든 ‘13도민중대표임시회의소(十三道民衆代表臨時會義所)’에서 황해도 지역 사무를 담당하였다. 이 단체는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一進會)[2]와 연결되어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哈爾濱)에서 저격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에 대한 사과와 일제의 강제 병탄 계획에 동조하는 성격을 띄고 있었다. 1909년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 지방대표에도 선출되었다. 1909년 까지의 그의 행적은 골수 친일파로 분류되어도 마땅한 행적이었다.

그러나 앞선 행보와는 달리 1910년 신민회(新民會)[3]에서 비밀리에 준비하였던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는 사업이 추진되자 참여하였다. 1910년 10월 권태선(權泰善)을 통해 서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을 이주시키는 계획을 알게 되었고 이에 동의한 것이다. 같은 지역 출신인 김용태(金溶泰)·고일청(高一淸) 등에게도 동일한 계획을 설명하여 추가로 동지를 모집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이 계획의 주요 인물인 양기탁· 임치정의 집에서 이주 계획을 협의하였고 평남 지역의 이주민 모집을 담당하였다.

이 계획은 1910년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황해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된 안악사건(安岳事件, 일명 安明根事件)으로 발각되었다. 당시 안악사건으로 160여 명의 신민회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이에 1911년 1월 양기탁과 임치정 등 16명의 관련 인사가 붙잡혀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른바 보안법위반사건(保安法違反事件, 일명 양기탁사건(梁起鐸事件))으로 불리었는데 안악사건과 연결되면서 신민회 외에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엮여서 탄압받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붙잡힌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여 이른바 105인 사건(선천음모사건(宣川陰謀事件), 신간회사건(新民會事件))이라는 왜곡되고 날조된 사건을 만들어냈다. 신민회 회원들이 조선총독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암살하는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하였다는 시나리오를 만들고 여기에 맞춰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여 허위 자백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재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고 1912년 10월 출옥하였다.

1915년 5월 박중화와 함께 서울에서 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김좌진·이기필(李起弼)과 함께 같은 해 11월 자금 모집을 위한 방법을 협의하고 추진하였다. 1916년 4월에는 중국에서 신문을 발행하려고 자금 모집에 나섰다. 이기필(李起弼)과 함께 경북 김천(金泉)에서 자금을 모집하였고, 다시 서울에서 자금을 모집에 나섰다가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재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3년에는 국민협회(國民協會)의 간부직을 맡으며 활동하였다. 문제는 국민협회는 1920년 1월 서울에서 민원식·김명준(金明濬)·김환(金丸) 등이 조직한 친일 단체라는 것이다. 1921년 2월 독립운동가 양근환의 의거로 회장 민원식이 처단되었으나, 김명준이 회장을 맡으면서 유지되었다. 국민협회는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탄된 상황을 ‘신일본’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양국이 협력하여 국가 건설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주장하였다. 즉, 황국신민으로 조선인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주면 일제의 강제 병탄을 합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조선내의 독립운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부정한다는 것이 국민협회의 취지였다. 이러한 친일파 단체인 국민협회에 간부로 활동하면서 1923년 5월 평남지부장, 6월 황해(黃海)지부장에 선출되었다. 이후에도 1924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의 사리원(沙里院)지국장과 사찰원으로 겸무하였고, 1927년에는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사무국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는 활동을 지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 운영하는 독립기념관에서도 감익룡의 친일-반일-친일 행적을 두고 동일인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고 한다. 독립기념관 한국운동사연구소 - 감익룡

회산 감씨 족보에는 감익룡이 상하이로 탈출해 양문석(楊文奭)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1932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당인 한국독립당의 행정위원을 역임했다고 소개되고 있으나 독립기념관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으므로 문중에서 조상의 공적을 부풀릴 목적으로 행적을 추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해당 족보에는 그의 친일 행적은 전혀 기록되지 않으므로 족보에 기록된 내용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에서 확인된 1927년 이후의 그의 행적은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1년 뒤인 1946년 9월 사망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독립기념관에서 조차 골수 친일파로 활동하던 20대 초반의 행적,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과 연계된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행적, 30대 중반부터 다시 골수 친일파로 활동하던 행적 등을 두고 감익룡이라는 인물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로 동명이인이 있는 것이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할 정도로 소위 문제가 될 요지가 있는 인물이다.

이렇듯 문제의 요지가 있는데도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될 수 있었던 이유는 신민회와 관련된 사건으로 일제 치하에 약 3년의 옥고를 치렀기 때문이다. 감옥살이를 겪고 일제에 굴복하여 다시 친일 행위를 한 것인지 고인이 된 그의 마음은 확인할 길이 없으나 독립운동을 했고 감옥살이로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기에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추서되던 해에도 그의 행적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으나 노태우 정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고초를 위로한다는 취지로 그의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조차 독립기념관에서도 그의 행적을 두고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두명의 감익룡이 있는 것이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할 정도인데 정말 동명이인이 존재한다면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독립기념관도 이를 주목하는 것이다. 친일파 감익룡과 독립운동가 감익룡이 동명이인이라고 가정하고 1990년에 애족장이 추서된 감익룡이 친일파 감익룡이라면 독립운동가 감익룡은 애족장에 추서도 못된 것이므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미로 독립기념관에서 동명이인 여부를 확인 필요성을 피력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감씨들은 단본이므로 동명이인이라면 한 집안에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다만 독립기념관에서도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고 했지만 한 명일 수도 있다.


[1] 초기 친일 행위, 초중기 독립운동, 중년 이후 친일 행위로 국가보훈처에서 운영하는 독립기념관에서도 그가 독립운동가인지 친일파인지 행적을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고 할 정도이므로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지만 상당한 친일 행위도 확인되는 인물이다. [2] 반일단체인 일진회가 존재한다. 한자로 日進會로 앞에 표기된 친일파 단체 一進會와 다르다. 1942년 이홍장(1926~1945. 8. 12) 등 학생들이 결성한 항일 단체로서 독립 운동을 벌였다. 만주로 망명하려 했지만 일제에 적발되어 1944년 해체되고 말았다. 감익룡이 가입한 13도민중대표임시회의소는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와 연결되던 곳이다. [3] 1907년 4월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창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