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5 13:19:19

가스통 드페르

<colbgcolor=#e50040><colcolor=#ffffff> 가스통 폴 샤를 드페르
Gaston Paul Charles Defferre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출생 1910년 9월 14일
프랑스 마르시야르그
(現 옥시타니 에로 마르시야르그)
사망 1986년 5월 7일 (향년 75세)
프랑스 마르세유
약력 프랑스 국회의원 (지롱드)
리부른 시장
아키텐 레지옹 의회 의원
소속 정당

배우자 앙드레 아불케 (1912 ~ 1993)
마리앙투아네트 스와테르 (1906 ~ 1992)
에드몽드 샤를루
종교 개신교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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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

2. 생애

1910년 에로의 마르시야르그에서 폴 드페르와 수잔 코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폴 드페르는 1961년, 수잔 코즈는 1971년에 각각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다카르로 갔다가 1922년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고 엑상마르세유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1931년 마르세유의 변호사가 되었다. 1933년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에 입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그는 레지스탕스 대열에 합류했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면서 그는 많은 가명을 사용했다가 1943년 마스로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1944년 마르세유가 해방된 뒤 마르세유의 언론사 르 프티 프로방살을 장악했다. 또한 마르세유의 시장을 맡았다가 1945년 장 크리스토폴이 시장을 맡으면서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만 뱅상 불랑 사건으로 크리스토폴이 물러나고 1953년 미셸 카를리니가 물러나면서 다시 시장이 되어 1986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제4공화국 출범 후 그는 펠릭스 구앵 내각에서 정보 담당 국무차관, 레옹 블룸 내각에서 해외담당 국무차관을 각각 역임했다. 1950년부터 1951년까지는 앙리 쾨유 내각과 르네 플르뱅 내각에서 해양부 장관을 역임했다.

1958년 제5공화국 출범 후 열린 총선에서는 낙선하여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상원의원으로 재임했다가 1962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를 계기로 다시 하원에 복귀했다.

196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좌파 진영의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좌파의 통일을 내세우며 출마한 인물은 프랑수아 미테랑이었다. 샤를 드골의 사임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는 미테랑이 불출마한 가운데 출마하기도 했지만 알랭 포에르, 자크 뒤클로에게 밀려 4위로 낙선하였다.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이 당선된 뒤 피에르 모루아 내각이 출범하면서 미테랑 행정부의 첫 내무장관이 되었다. 로랑 파비위스 내각이 출범한 뒤 국토계획부문 국무차관으로 임명되어 1986년까지 재임했다가 같은 해 마르세유에서 사망했다.

3. 여담

  • 드페르는 1935년 조제 아불케의 사촌인 앙드레 아불케와 결혼했다가 1945년 이혼했다. 1946년 마리앙투아네트 스와테르와 재혼했다가 1973년 이혼했고 같은 해에 프랑스의 작가인 에드몽드 샤를루와 재혼했다.
  • 드페르는 1967년 공화국민주연합 소속의 르네 리비에르 의원과 결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 리비에르가 의회에서 자신을 비난하자 "닥쳐라, 얼간이야!"라고 소리쳤고 리비에르가 사과를 요구했지만 드페르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리비에르는 드페르에게 결투를 요구했고 두 사람은 뇌이쉬르센에서 장 드립코프스키(Jean de Lipkowski)가 중재한 가운데 궁정검으로 결투를 벌였다. 리비에르는 이 결투에서 2번의 부상을 입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