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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white> 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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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코누르 우주기지의 N1[1] | |
<colbgcolor=#231f20> 운용 여부 | 퇴역 |
용도 | 초중량 발사체, 유인 달 발사체 |
제조국 | 소련 |
제원 | |
크기 | |
높이 | 105.3m (345 ft)[2] |
지름 | 17m (55.8 ft) |
스테이지 | |
총 단 수 | 5단 |
엔진 | NK-15[3], NK-15V, NK-21, NK-19, RD-58 |
LEO 페이로드 | |
대량 | 95t (209,000 Ib) |
TLI[4] 페이로드 | |
대량 | 23.5t (52,000 Ib) |
관련 로켓 | |
유사한 로켓 | 아레스 V · 에네르기아 · SLS · 새턴 V · 우주 왕복선 · 팰컨 헤비 · 스타십 · 창정 9 |
발사 기록 | |
상태 | 퇴역 | 개발 중단 |
발사장 |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
첫 발사 | 1969.02.21 |
마지막 발사 | 1972.11.23 |
사람 또는 화물 운송 | 소유즈 우주선, 달착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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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이 1960년대 달탐사를 위해서 제작한 4단 로켓. 달착륙을 놓고 경쟁하던 미국의 새턴 V 로켓에 상응하는 로켓이었다.그러나 미국의 새턴 V에 비해 개발이 많이 늦어졌기 때문에 미국보다 빨리 달에 갔다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미국의 승리가 결정난 1969년 2월 21일에서야 무인으로 첫 발사를 할 수 있었는데, 발사 66초만에 폭발해 버렸다. 이후 아폴로 11호가 발사되기 직전인 1969년 7월 3일 두번째 무인 발사를 시도했으나 200m정도 발사대 위를 날아가다가 연료펌프에 이물질이 끼면서 폭발하는 바람에 주변 발사대까지 같이 박살내면서 이후 한동안 더이상의 발사를 진행할 수도 없었다. 이후 1971년 6월 26일 세번째 무인 발사를 시도했으나 비행중에 진동이 발생하면서 지상에서 자폭 명령을 내려서 폭발하고 말았고 이듬해인 1972년 11월 23일 네번째 무인 발사를 시도했으나 역시 폭발해 버렸다. 이후 1974년 5월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총책임자 교체를 지시했고, 이후에도 계속 개발이 진행되었으나 1976년 개발 중단이 최종 결정되었고, 남아있던 N1 로켓과 부품들은 모두 해체되었다. 총 4번의 발사 실패로 수백톤의 케로신과 액체산소의 폭발과 함께 개박살나는 사고가 났는데 이는 인류 역사에도 손꼽히는 비핵 폭발이 되었다.[5]
소련의 우주계획이 워낙 철저한 비밀주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N1 로켓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소련은 표면적으로 유인 달탐사 계획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고 있었다. 다만 미국은 첩보 위성을 통해 N1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베일에 싸여 있었고, 소련이 붕괴된 후에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
2. 제원
높이 | 105m |
질량 | 2,750,000kg (2750t) |
LEO | 95,000kg (95t) |
TLI | 23,500kg (23.5t) |
제조사 | OKB-1 |
제조국 | 소련 |
생산량 | 9대[6] |
성공 | 0 |
실패 | 4 |
로켓 | |
Block A (1단 로켓) | |
직경 | 17.0m |
엔진 | NK-15 × 30 |
추력 | 45,400kN (10,200,000 lbf) |
연료 | RP-1/LOX |
연소 시간 | 125초 |
Block B (2단 로켓) | |
엔진 | NK-15V × 8 |
추력 | 14,040kN (3,160,000 lbf) |
연료 | RP-1/LOX |
연소 시간 | 120초 |
Block V (3단 로켓) | |
엔진 | NK-21 × 4 |
추력 | 1610kN (360,000 lbf) |
연료 | RP-1/LOX |
연소 시간 | 370초 |
Block G (4단 로켓) | |
엔진 | NK-19 × 1 |
추력 | 446kN (100260 lbf) |
연료 | RP-1/LOX |
연소 시간 | 443초 |
3. 상세
미국과 치열한 우주 경쟁을 펼치고 있던 소련은 달에 무사히 인간을 보냈다가 귀환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미국의 아폴로 계획과 기본적으로 같은 형태의 우주선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아폴로 계획에 상응하는 'L3' 계획을 세웠고, 유인 우주선으로 소유즈 우주선을 개발, 개량했고, 달착륙선으로 1인승 LK를 개발했다. 아울러 이들을 우주로 올려 보낼 발사체로 개발된 것이 N1 로켓이었다.N1 로켓의 특징은 1단부에 무려 30개의 엔진을 단 것이다. 1단부에 엔진 5개를 달았던 새턴 V에 비해 훨씬 복잡해 보이는데, 이는 F-1 같은 대형 추진력의 엔진 개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소련에도 발렌틴 글루시코 같은 일류 로켓엔진 설계자들이 있었지만, 로켓 개발 책임자인 코롤료프와의 반목으로 인해 글루시코가 로켓 엔진 개발을 거부했고, 대안으로 니콜라이 쿠즈네초프가 엔진을 담당했지만 필요한 수준의 상대적으로 출력이 적은 엔진만 사용이 가능하여 작은 엔진을 수십개 다는 걸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단일 엔진의 추진력을 높이려면 연소실 크기를 키워 한번에 더 많은 연료를 연소시켜 더 많은 추진 가스를 발생시키는 방법밖에 없는데, 문제는 연소실 크기를 무작정 키우기만 하면 연소실 내부에서 불완전 연소가 되는 연료의 양이 많아져 오히려 연소 효율이 떨어지거나 혹은 연소실 압력이 너무 높아져 폭발하게 된다.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이 이끄는 연구팀이 매우 강력한 F-1 엔진을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소련의 코롤료프는 이같은 대출력 엔진의 개발을 포기하고 작은 추진력의 엔진 30개를 다발처럼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려 30개의 엔진을 동기화하여 제어하기 위해서 너무 복잡한 기술이 필요했고 낙후된 소련의 제어 기술로는 이것을 컨트롤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결국 이것이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7]
N1 개발은 생각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케네디가 달에 갔다오겠다고 말한 후 소련이 시작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1959년 N1 개발이 처음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폰 브라운이 달 착륙 이외에 탐사선 등 잡다한 계획을 전부 집어치우고 오로지 아폴로 계획에 올인하자고 한 것과 다르게 소련은 유리 가가린 이후에도 다인승 유인우주선, 여성 우주인, 우주유영 실시, 탐사선 발사 등 여러가지 업적들을 하나하나 쌓아나가며 소련의 위대함을 계속해서 전세계에 홍보했다. 이렇게 하면서 소련은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을 훨씬 앞서나가는 것처럼 보였고, 미국은 내부에서 설계 및 테스트에만 주력할 뿐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은 이렇게 여러가지 판을 벌이다보니 정작 N1 로켓 개발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 후 과거 반동 혐의를 모두 사면받음과 동시에 혁명 영웅이 된 코롤료프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N1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맡아도 될 탐사선 계획 등에도 동원되곤 했다.
1964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했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겉치레와 체면을 중요시하던 흐루쇼프와 달리 실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우주 개발보다는 보다 실용적인 군사용 미사일과 군사용으로 전용이 가능한 우주정거장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일단 브레즈네프는 통일성 없이 진행되던 소련의 우주 개발을 좀 정리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유인 달탐사 계획도 코롤료프를 책임자로 일원화하여 정리했다. 이전까지는 코롤료프 말고도 첼로메이, 글루시코 등 여러 사람이 엮이면서 진척 속도가 느렸다. 첼로메이는 힘들게 N1 개발하지 말고 자기가 개발한 UR-500[8] 개량해서 쓰자고 주장했는데, 코롤료프는 UR-500 로켓은 유독한 연료를 사용하고 있어서 안된다고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로 권력을 잡은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와 친했던 첼로메이를 내치고 코롤료프로 일원화시킨 것이었다. 아울러 티격태격거리던 글루시코를 코롤료프로부터 떼내어 군용 로켓을 개발하도록 했는데, 브레즈네프나 글루시코 모두 군용 무기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코롤료프에게 좋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실용성, 즉 군사적 가치를 중시했던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 때와 달리 코롤료프가 달라면 달라는 대로 예산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코롤료프는 여전히 자금이 풍족하던 시절에 R-7을 개발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개발을 했다는 것이다. 즉 전체 설계 및 엔진 개발이 끝나면 중간 단계 테스트를 전부 스킵하고 전체 로켓을 조립했다. 그리고 R-7와 마찬가지로 한대 한대씩 날려보면서 어디가 어떻게 터지는지를 계속 관측하고 개선해 나갈 예정이었다. 브레즈네프가 예산을 대폭 삭감해서 테스트를 스킵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코롤료프의 작업 방식 자체가 설계가 끝나면 전체를 만들어 날려보고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수정하여 또 날려보는 식이었고, 결국 이게 돈이 더 많이 들었다. R-7 때도 성공할 때까지 여러 번 날렸고, N1도 애초에 총 14회 발사 계획이 짜여져 있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발렌틴 글루시코와의 오랜 원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9] 글루시코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련 최고의 로켓 엔진 전문가였으며, R-7는 물론이고 소련의 군사용 로켓 엔진은 글루시코의 456호 연구소가 전담해서 개발해 왔다. 흔히 코롤료프의 작품이라 얘기하는 R-7 로켓의 엔진도 사실은 글루시코가 개발한 것이었다. 코롤료프는 전체를 총괄 관리한 것 외에 R-7에 달려있는 자그마한 방향제어용 보조 로켓엔진을 개발했었다. 하지만 R-7 개발 당시에도 코롤료프와 글루시코는 사사건건 대립했는데, 코롤료프가 설계한 R-7의 복잡한 크로스 구조에 대해 비판했고 그 밖에도 연료 등 갖은 분야에서 마찰을 빚었다. 실제로 R-7은 그 복잡한 구조로 인해 테스트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를 거친 후에 발사에 성공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R-7 개발의 총책임자는 코롤료프였고 글루시코는 비록 코롤료프의 설계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설계를 거부하면 항명으로 우랄 산맥으로 끌려갈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코롤료프가 지시한 스펙대로 엔진을 설계해야만 했다.
글루시코는 N1을 위해 RD-270이라는 큰 추진력을 가진 엔진을 제안했다. 이 엔진은 전체적인 스펙에서 새턴 V 로켓의 F-1 엔진과 비교해도 거의 유사한 체급을 가진 엔진이었다. 하지만 코롤료프는 하이드라진 연료가 조종사들에게 유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글루시코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케로신을 연료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루시코는 더이상 코롤료프 밑에서 일하기를 원치 않았고 결국 소련 당국은 글루시코를 독립시켜 독자적으로 군용 미사일 개발을 담당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코롤료프는 글루시코 없이 엔진을 개발해야 했다. 코롤료프는 대추력 초음속 비행기 제트엔진을 만들던 쿠즈네초프 설계국에 로켓 엔진 개발을 맡겼다.[10] 개발된 NK-33엔진은 상술했다시피 미국의 F-1엔진 보다 훨씬 추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무려 30개 엔진의 클러스터링으로 극복하려했다.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지만, 원래부터 뭔가를 복잡하게 만들길 좋아했던 코롤료프의 변태같은 성향이 여기서도 강하게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R-7 때도 우주덕후들을 열광하게 만든 코롤료프 크로스에 대해 글루시코를 비롯해 많은 내부 반대가 있었다. 뭐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서 실패 확률을 높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스는 코롤료프였고 예산은 풍부했기에 코롤료프는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밀어부쳤고 여러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코롤료프는 국가의 영웅이 되었고, R-7의 성공으로 코롤료프의 자신감과 자만심은 동시에 높아졌다.
사실 글루시코에게 엔진 개발을 맡겼거나 최소한 글루시코가 설계한 RD-270 엔진을 사용했다면 NK-33보다 출력이 높은 엔진을 얻을 수 있었고 엔진 갯수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켓 개발, 특히 클러스터링 설계에 대해 스스로 과신하고 있던 코롤료프는 까짓껏 출력이 적으면 수십개 모아서 클러스터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은 그것을 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1966년 코롤료프가 정기적인 수술을 받던 도중 예기치 않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바실리 미신이 책임자가 되었다. 이미 기본 설계는 끝났기 때문에 미신은 코롤료프가 계획해 놓은 것을 그대로 추진했다.
원래 소련의 달착륙 D-데이는 볼셰비키 혁명 50주년인 1967년 10월이었다. 이때 달착륙에 성공한다면 더할나위 없이 멋진 승리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계속 지연되었다.
1969년 마침내 첫 발사를 실시할 수 있었다. 위에도 상술되어 있듯이 N1 로켓은 한번도 클러스터링 테스트를 하지 않은 상태로 곧바로 첫 발사를 진행했다. 원래 코롤료프와 그의 연구소가 하던 방식이 설계가 끝나면 중간 테스트는 스킵하고 일단 전체를 만들어 발사해 보고 어디가 고장나나 살펴보고 보완하는 식이었다. 실제로 N1 로켓은 총 14차례 발사가 계획되어 있었고, 12회까지 무인으로, 그리고 13회와 14회가 유인으로 발사될 계획이었다. N1은 무려 30개나 엔진이 달려 있었지만 발사 전에 한번도 클러스터링 테스트를 하지 않았고, 첫 발사가 첫 클러스터링 실험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100% 실패하리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2차 발사 때는 발사 직후 폭발하는 바람에 발사장과 그 주변이 모두 박살 났고 세번째로 발사하기로 되어 있던 옆의 로켓까지 날려버렸다. 이로 인해 계획이 2년간 연기되었다. 2차 발사 실패 2주후 미국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에 성공했다. 이후 3차, 4차 발사도 실패했고, 5차 발사 준비가 진행되던 도중 브레즈네프가 미신을 경질하고 글루시코를 총책임자로 앉혔다. 이후 5차 발사가 연기되었고, 1976년 모든 개발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무려 30개의 엔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N1의 수송 능력은 새턴 V의 2/3에 불과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NK-33 엔진은 케로신 엔진끼리 비교했을 때 결코 효율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F1보다는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새턴 로켓의 상단에 쓰이는 J-2로켓에 비해 효율이 안 좋고 클러스터링 된 디자인 특성상 추중비가 낮기 때문에 페이로드는 떨어졌다.
N1의 낮은 출력 때문에 소련은 N1에 탑재될 사령선인 소유즈 및 달착륙선을 크게 경량화해야 했고, 그 결과 소련의 달착륙선은 미국의 것보다 크기가 매우 작았고 1인승으로 설계되었다. 아폴로 우주선처럼 사령선과 달착륙선 간을 우주선 내부에서 이동할 수 없었고, 달착륙선에 탑승할 우주비행사는 일단 소유즈 밖으로 나가 EVA를 해서 달착륙선에 탑승하고 돌아올때도 EVA를 해서 소유즈에 돌아와야 했다. 심지어 소유즈 사령선 선체는 최대 지름이 2.1m에 불과해 세 사람이 허리를 펴고 앉을 수가 없어서 서로 어깨와 다리를 맞대야 했고, 가장 자리의 두 사람은 허리가 옆으로 휘어진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너무 좁아서 우주복을 입을 수 없었고 결국 소유즈 11호 전원 사망의 참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소유즈는 2인승으로 주로 사용되다가 경량형 소콜 우주복 도입과 좌석 디자인 개선 후 다시 3인승으로 사용된다.
N1의 잔혹사를 소개하는 영상. 일론 머스크가 42개 엔진을 묶어서 화성으로 쏠 우주선을 만들겠다 한 것을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11] 이후 구상이 계속 변경되어 2023년 2월 현재에는 33개가 되었지만 여전히 N1에 맞먹는 숫자다. 최근 시험했던 스타십 시험기들은 3기의 엔진을 탑재하고 있지만 착륙 때 이를 컨트롤하는데도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다.[12] 다만 2023년 11월에 진행된 스타십 2차 궤도 시험발사부터는 상승 중 33개 엔진을 모두 잘 제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2024년 6월 6일 4차 발사시험은 발사와 슈퍼헤비 부스터, 스타쉽 본체까지 착수에 성공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4. 발사 시도
- 1차 시도 : 1969년 2월 21일 (serial 3L, 존드 L1S-1) - 발사 68초 후 폭발
- 2차 시도 : 1969년 7월 3일 (serial 5L, 존드 L1S-2) - 발사 15초 후 폭발
- 3차 시도 : 1971년 6월 26일 (serial 6L, 소유즈 7K-L1E 더미) - 발사 51초 후 폭발
- 4차 시도 : 1972년 11월 23일 (serial 7L, 소유즈 7K-LOK - 발사 107초 후 폭발
발사 직후 전압 이상으로 12번, 24번 엔진 셧다운, T +6 때 2번 엔진에서 연소 불안정에 의한 진동 발생으로 추진제 유출 발생, T +68 때 엔진 전체 셧다운, T+138 때 다시 지구로 추락.
발사 12초 후 7번, 19번, 20번, 21번 엔진 셧다운, 발사 15초 후 18번 엔진을 제외한 모든 엔진 셧다운, 로켓이 18번 엔진 반대 방향으로 넘어지며 추락 시작, 발사 23초 후 지상 충돌 및 폭발
발사 39초 후 부스터 롤링 발생, 이후 짐벌락 현상 발생, 발사 48초 후 로켓 분해 시작, 발사 50초 후 엔진 셧다운, 발사 51초 후 폭발
발사 90초 후 과부하로 연료 계통 파열, 6개의 엔진 셧다운, 이후 4번 엔진 폭발, 발사 107초 후 로켓 분해 시작, 발사 110초 후 데이터 송출 최종 중단.
5. 매체에서의 등장
Space Agency에서 대형 발사체로 등장한다.폴아웃 3의 항공우주 박물관에 미국의 달 착륙선 모형으로 LK가 등장한다. 대체역사물이라 잘 알려진 아폴로를 쓰기는 곤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소련제를 따라 만든 듯 하다.
호러 영화 아폴로 18에서 아폴로 18호 비행사들이 달에 LK가 착륙해 있고 소련 우주비행사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외계 생물에게 당한 것으로 곧 아폴로 18호 비행사들도 외계 생물에게 당해 모두 죽게 된다.
대체역사물 드라마 포 올 맨카인드에서는 결국 N1의 이륙과 달 착륙이 성공하여 우주경쟁이 문자 그대로 우주전쟁 수준으로 번진 대체역사가 전개된다.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에서 AAA 분더에 유도미사일로 장착된 군함들의 추진로켓으로 사용된다.
6. 관련 문서
[1]
뒤쪽은 목업이다.
[2]
현재 기준으로도 큰 편이다.
[3]
30개
[4]
달 전이궤도
[5]
N1 로켓 폭발이 6kt 규모로 비핵 인공폭발 중 최대라는 주장이 있는데 다른 영문 자료에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영문위키에서 이것에 대해 토론이 있었는데 이정도까지는 아니고 0.3~1kt정도 위력으로 보고 있다.
참고
[6]
1,2호기는 테스트, 3,5,6,7호기는 발사되었고 4호기는 스크랩, 8,9호기는 프로그램 취소로 인해 폐기되었다.
[7]
다수의 엔진을 클러스터링하는 기술은 쉬운 일이 아니며 클러스터링을 위한 설비들은 불필요한 중량을 증가시키는 물건이다. 괜히 B787을 위시한 항공기들과 로켓들이 고출력 엔진을 달아 엔진 수를 줄이는 게 아니다. 또 N1에 적용된 케로신-액체산소 엔진이 미국의 액체수소-액체산소 방식보다 에너지 효율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8]
이 로켓이 바로
프로톤 로켓의 초기형이다. 20.7톤의 LEO(지구저궤도) 중량을 갖고 있었으며, 후의 개량형은 22톤까지 LEO에 올릴 수 있었다. 현재를 기준으로도 매우 고중량 고성능의 발사체로, 현재 러시아도 무거운 모듈 발사에 잘 써먹는 중이다.
[9]
이 두 사람의 원한 관계의 시작은 다름아닌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시작되었는데 코롤료프와 글루시코가 서로를 NKVD에 밀고했고, 사이좋게 둘 다 굴라그로 끌려갔기 때문... 코롤료프가 수술 도중 사망한 것도 이때 굴라그에서 건강을 크게 해치고 그 뒤로도 과로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10]
쿠즈네초프 설계국의 엔진은
Tu-144,
Tu-160 등에 사용된다.
[11]
영상의 초중반에 사용된 배경음악은 영화
아폴로 13의 발사 장면 OST이다. 아이러니하군
[12]
물론 이는 지구권 착륙을 위한 일명 벨리 플롭 기동이 엄청난 난이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로켓을 수평으로 뉘어 종단속도를 최대한 줄였다가 다시 수직으로 세워 착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2단 부분으로 1단의 슈퍼헤비 부스터의 경우 본질적으로
팰컨9 로켓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여 기술을 완전히 새로 개발해야 하는 수준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팰컨 헤비 로켓의 엔진이 27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