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14:19:56

5.1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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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사건 이후

1. 개요

Peristiwa 13 M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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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말레이인 중국인 간의 갈등이 불러일으킨 참극이다. 1964년에도 당시 말레이시아의 주였던 싱가포르에서 한 번 유사 사태가 발생한 적은 있었으나 이 사건은 그 규모가 훨씬 컸다.

2. 상세

1969년 5월 10일 선거에서 이긴 중국계가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로 축하 행진을 하다가 5월 13일 말레이계 지역인 Kampong Baru를 지나갔는데 거기서 말레이계와 충돌이 일어났다. 혹자에 의하면 한 중국인이 빗자루를 들고 나서 쿠알라룸푸르에서 말레이계를 쓸어내는 어그로 시늉을 했다는 소리도 있다. 여튼 여기에 빡친 말레이인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차와 상점을 불태우고 사망자도 났다. 공식적인 사망자의 수는 2백명이지만 언론에선 2천명까지 사망자를 추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폭동은 오로지 슬랑오르 주에 국한됐고 중국인이 많이 사는 페낭이나 이포 같은 지역으로까지 번지진 않았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3. 사건 이후

이 사건 이후 말레이시아에서 인종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금기시되었다. 그래도 1980년대까지 인종을 갖고 장난치는 것은 아이들 사이에서 흔한 편이었으나 이후에는 이마저도 터부시된다.

사건 이후 툰쿠 압둘 라만 총리는 수습에 들어갔으나 별다른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고 최후의 선택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훗날 민주행동당(DAP) 등 야권으로부터 독재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뭐 상황이 나빴기 때문에 불가피하기는 했지만...

결국 라만은 1970년에 당 내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임했다. 후임으로 취임한 압둘 라작이 빠르게 수습했기 때문네 더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 Rukun Negara라는 일종의 국민의례가 제정되었고 말레이인의 권위가 약한 것이 원인으로 판단되어 일명 부미푸트라 정책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현재도 갈등은 만만치 않으며 역으로 중국인의 권력이 세지면서 그나마 잠잠해졌던 말레이 우선주의가 부활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인종을 언급하는 것을 지나치게 금기한 결과 사소한 문제로도 " 인종차별"에 휘말리는 심각한 고질병이 남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말레이시아인 모두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