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19:06:08

38년 알렉산드리아 폭동

1. 개요2. 배경3. 전개

1. 개요

38년 로마 제국 황제령 아이깁투스[1]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들이 벌인 반유대주의 폭동.

2. 배경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알렉산드로스 3세 아케메네스 왕조를 잇따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한 이래, 그가 세운 신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로 손꼽혔다. 이 도시의 거주민들은 그리스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의 뒤를 이어 이집트에 군림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홍보에 따라 그리스에서 이주한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수많은 이방인들도 이곳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는데, 그 중엔 이집트에서 인접한 시리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특유의 끈끈한 공동체 의식과 탁월한 상업 역량을 발휘해 알렉산드리아에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된 지 300여년이 지난 서기 1세기 무렵, 10만 이상의 유대인이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다. 그들은 도시의 5개 구역 중 2개 구역에 주로 살았지만, 다른 세 개 구역에도 상당수의 유대인이 살았다.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도시의 원주인인 그리스인들과 상당한 수준의 교류를 했다. 두 민족간의 통혼은 흔했으며, 유대인 상류 가문들은 헬레니즘을 앞다퉈 수용하고 자녀들에게 그리스식 교육을 수행했다. 그리스 학자들도 유대교의 엄격하면서도 체계적인 교리에 호감을 표했으며, 적지 않은 그리스인이 유대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의 교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유대인 플라톤'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그리스 철학에 통달했지만 율법 준수와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는 것 역시 중시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두 이질적인 민족이 한 도시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면서 언제나 화목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많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신화를 배격하고 자신들이 믿는 신만이 진정한 신이라는 유대인들의 배타적 신앙을 고깝게 여겼다. 유대교 원리주의자들 역시 헬레니즘에 빠져들면서 유대교 신앙심이 약해진다고 여기고 반헬레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도시 빈민들 사이에서 떼돈을 벌어들여 도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부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커졌고, 상류층 역시 유대인들이 도시의 주도권을 가로채려 들까 걱정했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두 민족간의 충돌이 간혹 벌어졌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역대 파라오들은 갈등을 조정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기원전 30년 프톨라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살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정복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는 국가의 지배민족으로서 상당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이집트가 '아이깁투스 황제령'으로 전락한 뒤에는 동방의 일개 도시민 취급을 받게 되고 지금까지 누렸던 특권을 상당수 박탈당하고 속주세를 납부해야 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이 로마의 지배에 순응하도록 다른 민족에 비해 낮은 세율을 내도록 했지만, 그들은 특권을 잃고 일개 속주민으로 전락한 사실 자체만으로도 상대적 박탈감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여러 유대인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면서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는 오직 자신들만이 정치에 관여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한 수 아래라고 여겼던 유대인과 동등한 취급을 받고 더 나아가 로마 시민권을 획득해 자신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기도 하니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유대인을 비방하는 움직임이 알렉산드리아 내 그리스 학자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졌다. 아피온은 <유대인 반박문>에서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그리스인 학자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를 인용하면서, 과거 이집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나병 환자들이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출애굽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사서이자 스토아 철학자 카이레몬도 아피온과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이시스 여신이 꿈 속에서 당시 파라오 아메노피스에게 나타나 전쟁 중에 자신의 신전이 파괴된 것에 대해 꾸짖었고, 거룩한 서기관 프리토바우테스가 파라오가 이집트에서 오염된 사람들을 쫓아낸다면 더 이상 경고를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권했다고 서술했다. 이에 파라오는 25만 명의 병자를 모아서 추방시켰는데, 그들의 지도자 중에는 모세 요셉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에서 한 때 유대인들이 이집트인을 통치했으며 나병 때문에 쫓겨난 건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야곱-요셉을 기점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체류와 모세의 출애굽이 힉소스의 이집트 침공 및 추방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전제 하에 힉소스의 어원을 포로와 연관시켰다. 그러면서 마네토의 글을 인용해 힉소스가 포로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이집트를 정복했지만, 테베의 이집트 왕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이집트에서 쫓겨난 뒤 광야를 지나 시리아에 들어가서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 예루살렘을 건설했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양측간의 비방전이 오가면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불온한 기류가 흘렀다. 그러던 38년 초여름에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 직후에 심각한 폭동이 일어났다.

3. 전개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 헤로데 대왕의 손자로, 어렸을 때 로마에서 살면서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등 로마 황족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러던 38년, 아그리파스는 칼리굴라 황제로부터 이집트를 거쳐 유대 왕국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들어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찾아왔을 때, 유대인 공동체는 크게 호응했다. 아그리파스가 왕의 휘장을 입은 채 창을 든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고 금과 은으로 도금된 갑옷을 입은 채 거리를 행진하자, 유대인들은 떼지어 몰려와서 환호했고 그를 환영하는 대중 집회를 개최했다.

그리스인들은 이 모습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를 온전히 장악해버릴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이에 그들은 대응에 나섰다. 체육관에서 유대인들의 의식을 해학적으로 연출했으며, 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 카라바스를 아그리파스로 분장하고 그를 "우리의 왕"으로 받드는 등 아그리파스를 환영하는 유대인들을 조롱했다. 아그리파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시리아로 향한 뒤, 그리스인들은 극장에서 대중 집회를 열고 모든 집회소에 황제의 형상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이 유일신만 섬기는 교리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자, 그리스인들은 "저들이 제국에 반기를 들려 한다"라고 주장하며 유대인 회당을 향해 물리적 공격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칼리굴라가 자신이 죽을 시 황위 계승권을 물려받기로 약정할 정도로 무척 아꼈던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가 로마를 휩쓴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 칼리굴라는 율리아 드루실라를 율리우스 가문의 시조로 여겨진 미의 여신 '비너스'와 연계지어 그녀를 신격화하고 애도를 국가 장례로 표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은 드루실라에 애도를 표하기 위해 상점을 닫고 그녀를 기리는 제사를 드렸다. 유대인들이 이번에도 드루실라에게 경의를 표하는 제사를 드리길 거부하자, 그들은 이를 빌미삼아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필로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유대인들을 만날 때마다 돌로 치거나 막대기로 때렸으며, 갓난아기이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쳐죽였고, 어느 유대인들은 극장에 끌려가서 익살스러운 연기를 강제로 해야 했고, 운이 나쁜 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죽은 자가 수천 명에 달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게토에 강제 수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아이깁투스 장관을 맡고 있던 아울루스 아불리우스 플라쿠스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치세 말기부터 칼리굴라 초기까지 강력한 권세를 누린 근위대장 마크로의 측근이었으며, 칼리굴라의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의 강제 이송에 한 몫을 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마크로가 칼리굴라에게 숙청된 뒤 자신 역시 그렇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2] 그는 그리스인들이 황제 초상화를 앞세워 유대교 신전으로 가지고 간 것을 보고, 섣불리 진압하려 했다가는 "칼리굴라 황제의 신격화를 반대한다"라는 모함을 받을 것을 우려해 내버려두기로 했다.

장관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자, 유대인들은 그가 그리스인 편만 든다며 분노했다. 그들은 칼리굴라에게 직접 사정을 설명하기로 마음먹고,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를 포함한 사절단을 구성하여 로마로 파견했다. 필로는 저서에서 칼리굴라와 대면했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면서, 황제는 젊은 나이에도 무척 총명하고 재치가 많은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신들 얘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고 그리스 대표자들의 편만 들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마지막 날에 유대 사절단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는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것만큼 악질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어리석은 민족인 건 확실하다. 내가 신의 본질을 상속한 것을 믿지 않는다니 말이다.”

필로는 사절 임무가 실패했다고 여기고 낙담했지만, 칼리굴라는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황제는 그리스인들의 학살을 방관한 아이깁투스 장관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를 해임하고 새 장관을 세워서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다시는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해임된 플라쿠스는 곧 추방되었다가 황제에게 반역을 꾸민 혐의로 고발된 뒤 처형당했다.

그러나 40년 칼리굴라가 갈리아에서 게르만족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리스인들이 승리를 기념해 제단을 만들었을 때 일부 유대인들이 제단을 허문 사건이 벌어지자, 칼리굴라는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유대인 회랑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페트로니우스는 그랬다간 유대인들이 반발하여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황제의 명령을 가능한 한 미뤘다. 황제는 총독의 명령 불이행에 분노하여 긴급서한을 보내 빨리 시행하라고 촉구하며, 끝까지 시행하지 않는다면 자살하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서한이 도착한 41년에 칼리굴라가 암살당했고, 페트로니우스는 칼리굴라의 명령을 파기했다.

칼리굴라 사후 황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 1세는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를 유대-사마리아의 왕으로 세웠다. 뒤이어 38년 알렉산드리아 폭동 사건을 재조사한 뒤 반 유대세력의 지도자였던 이시도로스와 람폰을 체포해 로마로 압송한 뒤 처형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서신을 보내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화합을 촉구했으며, 로마 시민권을 수여받은 유대인들의 특권을 앞으로도 인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리하여 분쟁은 봉합되는 듯했지만, 두 민족간의 갈등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때 알렉산드리아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115년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했을 때 유대인들이 키프로스와 키레나이카에 거주하는 그리스계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 후 반유대주의가 극성을 부리면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가속화되었다.


[1] 속주가 아닌, 황제의 영지 형태를 띄고 있다. 따라서 파견된 사람은 원로원 의원이 아닌 기사계급 로마인이었고, 황제 대리인 자격을 가진 전문 관료들이었다. [2] 마크로가 숙청된 결정적 이유는 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르기 전, 마크로와 그 아내가 젊은 황족으로 위치가 애매한 칼리굴라에게 반강제로 스폰서 비슷한 것을 맺으라고 강요하고, 그 대가로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 자리를 주겠다는 각서를 요청한 일 때문이었다. 물론, 칼리굴라는 이를 역 이용한 다음 토사구팽해 제2의 세야누스를 제거하려고 했고, 마크로는 극적으로 몰락한 까닭에 여기에는 황제와 황실이 프라이토리아니를 완전히 장악하고자 한 정치적 목적이 컸다.(그래서 칼리굴라는 마크로 후임으로 아레키누스 클레멘스와 함께, 아버지 생전부터 가신인 게르마니아 주둔 로마군 백인대장 출신 카시우스 카이레아를 공동 근위대장으로 삼았다.) 따라서 종손의 이런 술수를 눈치 챈 티베리우스 황제는 측근들의 예상과 달리, 권모술수를 꽤 잘 부리며 정국을 운영할 재주를 보인 그를 혼내지 않고 유심있게 지켜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