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23:06:15

2차 위나라 내전

<colcolor=#000> 2차 위나라 내전
二次魏國內戰
The Second Civil War of Wei
시기 기원전 322년
장소 위나라령
원인 위왕 위앵의 위신 계[1] 후계자 내정과 이로 인한 위사의 불안 심화
교전
세력
위사군魏嗣軍
주周
위魏
조선朝鮮
제齊
한韓
송宋
지휘관 공자 위사†
옹저†
공손희†
위장[2]
도도[3]

주 대부 안율†
위왕 위앵
공자 위신
공손연(서수)

우장군 비비오
부장 미상[4]

제 태자 전벽강
정곽군 전영

대부 한거
병력 위사군 총 11만 3천

주군 규모 미상
위 하동군 예비병력 6만
위앵군 1만

조선군 보병 4만, 기병 1만 3천

전벽강군 2만 7천[5]
전영군 3만 2천[6]

한군 1만 7천

송군 2천 1백[7]
피해 위사군 8 만이상[8]

주군 미상[9]
규모 미상
결과 위사군 패망, 신릉군의 존재 여부 완전 말소를 비롯한 위나라 직계의 완전 가상인물화
영향 조선-위 관계의 개선, 공손연의 집권

1. 개요2. 배경
2.1. 위나라의 사정2.2. 위사의 거병2.3. 주의 사정2.4. 조선의 사정2.5. 제의 사정2.6. 한의 사정2.7. 송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진군 속행3.2. 한군, 제풀에 지치다3.3. 도하전3.4. 위사의 응대3.5. 위사의 망집3.6. 배신을 하려거든 프로답게 13.7. 최후의 계책
4. 결과5. 전후처리
5.1. 배신을 하려거든 프로답게 25.2. 위나라의 보상5.3. 위사 귀신의 저주?

[clearfix]

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 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위나라의 후계구도 확정 과정에서 발생한 후보자 간의 상관관계로 인한 분란의 조짐을 위혜왕 위앵이 끝내 눈치채지 못하면서 위 공자 위사가 생존 및 찬탈을 목적으로 기습적으로 거병한 내란이다.
이로써 위앵은 자신의 대에 두 번씩이나 왕위를 노리는 공/왕족의 반란을 겪게 되었다.

2. 배경

2.1. 위나라의 사정

위혜왕 위앵은 중원대전 이후 한 번 심대한 타격을 입은 위나라의 자강을 꾀하는 과정에서 진퇴가 모두 있었지만 종합적으로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언젠가 끝을 다할 것이기에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을 이를 고르는 과정에서 그 후보는 둘이었으니, 각각 태자이자 하동을 근거지로 둔 첫째 위신과, 하남에 근거지를 두고 근거지 상 조선과의 대외관계를 담당한 위사였다. 위신은 장자였지만 위앵이 몇십년 동안 공들여서 모아놓은 국력에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했다는 천재일우의 상황에서 시도한 서하전투에서 대패하고 포로로 잡히는 등 하자가 꽤 있는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위사는 은근히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며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고민 끝에 위신을 고른 위혜왕이었지만 뭔가 불안함을 느꼈는지 위사에게는 알리지 않고 위사를 대량으로 불러들이고, 공개적으로 위신이 후계자이며 만에 하나 위신이 부재하게 되면 그 자식에게 승계할 것까지 선언한다.[10]
이에 위신은 위사에게 자신의 승리가 확실시됨을 눈빛으로 의기양양하게 내비쳤다.

2.2. 위사의 거병

일이 이렇게 되자, 위사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또 더 늦어지기 전에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반란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굳히고 이에 거병할 사전 작업으로 주나라에서 도망친 인민을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주나라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위사는 눈치 빠르게 빠져나가고 이러한 극단적인 수까지 생각지 못한 위혜왕과 위신의 눈을 여유롭게 피한 채, 여러 이권을 유력자들에게 약속하면서 자신이 끌어 쓸 수 있는 모든 여력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하고 즉시 왕도 대량을 포위했다.

이 군세의 규모는 11만 3천, 그 숙련도도 반군으로써 거병하였음을 감안하면 꽤나 기강에 날이 서 있었고 자신의 측근 중에서 지모나 군재를 담당해줄 이 또한 포진해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이렇게 전투가 일어질지 몰랐던 대량에는 3개월 정도밖에 버틸 여력이 없었다.
변수가 될 요인을 국내로 한정한다면 위사는 완벽하게 위앵-위신-위래 측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2.3. 주의 사정

위사의 제안에 응한 주나라는 대부 안율을 장으로 하여 내응군을 보냈지만 이를 늦게나마 눈치챈 공손연(서수)의 폭력을 동반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압에 결국 철군명령서를 작성하여 공손연의 손에 쥐어주게 된다.
만에 하나까지 생각한 서수는 이미 주의 주력이 대량으로 향했음까지 강조하며 여차하면 짓밟을 것이라는 언질로 태도를 확실히 할 것을 종용하였다.
주의 태사가 이에 울분을 내비치거나 말거나, 이로써 대부 안율과 휘하 병사들은 거사의 성패가 결정되기도 전부터 진퇴양난의 형세를 맞이했다.

2.4. 조선의 사정

한편 태자 위신의 남편인 기람은 비록 공손연의 간계, 혹은 설득으로 위신과 별거 중인 신세가 되었으나 난의 조짐이 보이자 비공식적인 경로로나마 조선에 이 소식을 전달했다.
여기에 더해서 위나라에서 공식적인 구조 요청이 왔고, 조선은 일단 조선 왕족을 남편으로 둔 위신을 지지하기로 결정, 즉시 비비오와 다수의 기병을 포함한 병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일전에 재정을 소진하고 그 해 들어올 소출을 감안해도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잘 해야 5만 3천, 본래는 여력을 모두 써서는 안되나, 이미 약 10만정도의 반군을 예측한 시점에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고, 이 개입은 차후의 운신폭을 당분간 명백히 줄일 것이었다.[11]

2.5. 제의 사정

수원을 통해 위에서 난이 일어남을 알아챈 제위왕 전인제는 이내 복양과 상구도 같은 것을 보았다는 보고를 들은 즉시 현재 동원여력을 물으니 정도에서 3만2천, 복양-범현-아읍 급행경로로 2만 7천, 총합 5만 9천의 여력을 확인하였다.
제나라 유가의 반발도 염두에 둔 이상 애초에 반역자를 돕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제나라의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이내 전인제의 명이 떨어지니, 정도의 병력은 정곽군 전영, 복양-범현의 병력은 태자 전벽강을 장으로 하여 위와의 우호관계 절대유지를 목적으로 대량이 반군의 손에 떨어지면 안되는 것을 강조하면서까지 급파되었다. [12]

2.6. 한의 사정

좋든 싫든 워낙에 이웃나라인 한나라는 보이는 동태만으로도 상황을 대번에 파악했고, 비록 무언가를 받아내겠다는 속셈이 있었지만 반역자인 위사를 지원하는 대신 대량에 갇힌 위앵-위신 측을 구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한왕 한강은 이에 대부 한거를 주장으로 한 1만 7천의 병력을 파견하는데, 이 병력은 당시의 연전에 의한 피로 가중이라는 열악한 상황을 감안하고도 메타적으로 련도 90이라는 한나라 치고는 경이로운 정예도를 보였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한의 왕도 신정은 단순 재정난도 아닌 파산 직전까지 확정이었기에[13] 한나라는 어찌되든 그 희생에 걸맞은 벌충만이 유일한 길이 되어버렸다.

2.7. 송의 사정

폐주 대언의 전횡과 이로 촉발된 모든 것의 여파를 수습하는 중이었던 송왕 연홍옥과 송나라였지만, 원래라면 식량 지원을 받을 예정이었던 것이 난이란 이변 때문에 홍구의 수운이 차단당한 것을 풀어야만 했던지라 개입 의지는 확고하였다.
단 그 사정상 제군의 부속으로 사실상 그냥 사람인 2천 1백의 병력을 딸려보내는 것에 불과하여 큰 도움은 안 되었다.

3. 전투의 전개

3.1. 진군 속행

송나라는 난이 일어난 직후부터 까딱하면 나라 전체가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따라서 품위고 뭐고 국력관계상 상하관계고 뭐고 따지며 예의를 차릴 여유 없이 눈이 뒤집혀 있었고, 이는 자국이 현 국제관계에서 맹주였던 전영이 정도군의 진군을 속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여담으로 진나라는 이 희대의 사태에도 낌새조차 못 챘는데, 공손연이 신강과 최전선 일대의 병력을 움직이지 않는 조치를 해두어 겉보기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연출하면서도 공손연은 하동군에서 6만을 차출하였는데, 이들은 진나라를 기만하기 위해 오로지 후방 예비대로만 구성되었지만 그 련도가 메타적인 수치로 84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정병들이었다.

3.2. 한군, 제풀에 지치다

제 태자 전벽강이 복수를 도하하고는 난이 시작한지 1개월이 흘렀다. 조선군은 기수를 건너고 정도군은 소황 외곽에서 서전을 겪고, 한군은 초성에서 저항을 좀 받고 위의 하동군은 녕현에서 약간의 저항을 마주하였다.

그러나 이 저항 때문에 전벽강군과 조선군을 제하면 군의 거동에 제약이 걸렸고, 전투원으로써는 가장 동원규모가 약세였던 한군은 병참지원의 열악한 내막이 겹쳐 초성을 제압하자마자 여력을 다하여 기동이 늦어졌다.

3.3. 도하전

빠르게 진격해서 하수까지 도착한 비비오와 조선군이었지만, 위군 근왕파의 연계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하동군을 이끌고 온 공손연은 타국의 조력은 기꺼워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먼저 하수를 건너는 상황을 원했고, 결국 위군의 도움 없이 위사군의 포진을 타파하며 도하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한편 전벽강군은 제수를 도하하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바로 건너편이 대량인 군세가 둘에 이르렀다. 이내 조선군 또한 공손연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제수를 건너니 대량을 눈앞에 두고 위사군 대 위 하동군 - 전벽강군 - 조선군의 구도가 되었다.
전벽강군과 조선군을 합쳐 8만의 군세가 되었지만, 저 건너편엔 어찌되었든 10만이 넘을 반군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전벽강은 동원한 군세가 모두 합쳐지지 못함을 아쉬워하였다. 전영군은 호편에서 발이 묶여 기한이 2개월가량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즉응전력으로 칠 여지가 없어졌고, 도하전의 어려움은 명약관화했다.
이에 비비오는 자신의 병력의 기동성을 믿고 위사군을 유인하는 것을 겸해서 기병 1만 1천을 가지고 상류에서 먼저 도하할 것을 자청했다.
조선군의 남은 병력이 총대장의 부재를 감내할 수 있을지를 전벽강이 염려했지만 비비오의 부장은 조옹이 직접 붙여준 초원 시절의 손발맞던 전우였고, 이를 바탕으로 농성 여력이 간당간당할 대량으로 직행해 포위를 흩은 뒤 도하를 저지할 병력 또한 실상 양방향에서 친다는 결정이 이내 이루어졌다.

3.4. 위사의 응대

강 건너라지만 일단 뒤에 제조연합군 7만 3천 가량이 등 뒤를 노리고 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위사는 잠시 그냥 대량을 닥치고 뚫어버릴까도 생각했으나, 이내 도하를 견제해 피해를 강요하기 위해 대량성 포위망에 5만만 남기고 강을 방비하는데 병력을 돌리니, 그 장을 공손희로 하였다.[14]

이는 위사군 입장에서도 타당한 판단이었다. 내부 사기 저하 등의 여러 요인을 감안할 때 최대 농성 기간 3개월을 모두 채우고 나서야 항복하는 건 말도 안 되었고, 공손희의 판단으로도 1개월만 더 버티면 대량이 제풀에 나가떨어져 위사군 손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정곽군 전영 또한 일부 병력을 차출해 호편을 견제하는 동시에 전벽강에게 합류하기 위해 움직였고, 한군 또한 지지부진하게나마 움직이고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건 이들이 전장에 도착해서 뭘 하기 전에 대량이 떨어지거나 위사군이 앞뒤로 포위되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들은 아무래도 상관 없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제조연합군이 앞서 길을 닦아놓은 공손연과 하동군의 도하 또한 완료되자, 비비오는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직접 기병을 몰고 상류를 건넜다. 하지만 도하위치인 소해에는 위사군의 초병이 있었고, 이는 곧 공손연과 위사에게 비비오의 기동이 전해짐을 의미하였다.

3.5. 위사의 망집

그러나 소식을 들은 것은 악영향을 끼쳤다.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던 위사는 소식을 접하자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동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전벽강군, 비비오가 이끄는 조선군, 거기에 한군까지 자신의 반대편의 손을 들자 왜 누구도 자신의 편이 아닌지를 쓰디쓰게 읊조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위사군의 책사 위치에 있었던 옹저는 그저 다음 대응은 무엇인지를 물었을 뿐이었다.[15]
끝내 정신이 완전히 무너지다시피한 위사는 이성을 놓아버리고 시선을 대량에 고정한 채 혈안이 되어버리자, 일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옹저는 무방비한 위사를 살해한 뒤, 곧 다가올 조선군에게 투항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를 위해 아예 대치중인 공손희의 병력과 주나라 군을 제물삼을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이미 성이 헐거워져있는 모습에서 비비오는 옹저의 계획을 간파했고, 기가 찬 채 옹저가 자청해서 사자신중충의 계였음을 증명하려는 것을 방조하였다.

3.6. 배신을 하려거든 프로답게 1

1개월도 못되는 짧은 새에 일이 이렇게 된 사이 전벽강군과 공손희가 이끄는 위사군... 아니 이제는 공손희군과 주군은 옹저의 항복 사실이 전해지지 않은 채 여전히 대치상태였으나 이 소식이 전벽강에게 전해지고 이것이 공손희군에 퍼졌다.
그러나 공손희는 우군의 배반을 믿지 않았다. 그 믿음을 유지한 것을 본 전벽강은 공손희의 실력 때문에 전영군의 합류까지 기다릴 셈으로 대치했고, 이는 곧 공손희가 믿음이 배신당했음을 직접 똑똑히 보게 되는 믿거름이 되었다. 옹저는 모든 게 끝난 상황에서도 기어이 버티는 공손희에게 질릴 새도 없이, 이 지지부진한 상황을 보다못한 비비오와 기병을 나서게 만들었다.
비비오가 나서면서 조선군의 일격이 시작되자 공손희군은 조선군에게 즉시 우군과 중군을 이내 돌파당해, 비비오는 공손희를 6합만에 베었다. 전벽강은 합류한 전영군이 나설 필요도 없이 상황이 끝나자 비비오의 무용을 특히 높게 보았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을 때 공손희군은 절반으로 줄어있었다.

3.7. 최후의 계책

한편 주의 대부 안율은 애초에 책사가 남의 책략에 의존했음을 한탄하며 모든 것이 끝난 상황에 직면하였다. 위사에게 책을 잡혀 공손희와 함께 제조연합군의 도하를 방위하게 되면서 쥐구멍마저 완전히 막힌 것이다.
그러나 안율은 자신은 몰라도 주의 백성들일 자신의 병사들은 끝까지 눈에 밟혔다.
이 연합군의 맹주가 제나라임을 알고 있었던 안율은 여차할 경우 위사에게 강제로 동원당한 것임을 강조하며 제에 투항할 것을 지시했고, 이내 전벽강이 그 의중을 짐작하고 그들을 후방으로 물린 채 위사군의 잔재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수많은 화살이 쏟아지기 직전, 대부 안율은 멀리서 부장으로부터 계획이 성공했다는 신호를 받고 미련 없이 다가오는 유시들을 맞이하였다.

4. 결과

위험한 상황에서도 대량은 어찌저찌 버텨냈고, 왕위를 차지하려던 반란은 반란군의 내란으로 다소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위앵이 평생 길러놓은 하남의 여력이 망가져버린 것이나 복구를 빼고도 아직 많은 것이 남아있었다. 특히 전후처리를 위해 이때까지 움직였던 전군이 모인 상황에서 그 기류는 무게를 더해갔다.

5. 전후처리

위사군을 처리하고 대량을 해방시킨 제군, 한군, 위 하동군, 조선군, 옹저군은 모두 대량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가장 먼저 당면한 문제들이 도마 위에 올랐다.

5.1. 배신을 하려거든 프로답게 2

옹저군은 사실상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위사를 찔러죽이면서 자기 밑의 병사들 입단속은 어찌저찌 해냈지만, 공손희군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본인의 역량 부족으로 아무런 기여도 못한 옹저는 결국 실제 관계를 증언해줄 고위급 포로를 모두 제거하는데 실패했고, 그들의 증언은 옹저 또한 본디 가담자였음을 밝혀주는 실마리가 되었다.[16]
옹저의 무능함이나 뻔뻔하게도 배신하려는 모습을 어이 없어하던 비비오나 전벽강도 옹저를 조금도 응호할 생각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방치, 혹은 처벌에 가담했고, 옹저와 그녀를 따라 한 때 동료를 내쳐서 신세를 세탁해볼 생각이었던 병사들은 이내 곧 반역 혐의에 걸맞은 엄벌이 내려졌다.

5.2. 위나라의 보상

옹저의 일은 옹저의 일이고, 위나라를 위해서 열국이 많은 군사를 보낸만큼, 위나라는 열국에게 보상을 해주어야만 했다.
조선은 죽거나 다친 장정들을 들어서 땅을 요구했는데, 위나라는 어떻게든 요충지인 중모만은 피해달라고 부탁하며 중모 이북의 탕음과 임려를 제시했으나 5~6천의 조선 장정들이 죽었는데 그곳의 장정 수가 얼마냐는 질문에 입을 다물고 중모를 할양하기로 했다. 이 때 보상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 송이 조선에게 더 큰 보상을 주기를 권하자 기수의 상류와 중류도 주기로 했다.
사실상 한게 없는 한나라에게는 땅을 줄 생각이 없다고 넌저시 말했지만 한거는 조정의 뜻에 따라 대량과 지척인 양릉을 요구했고, 위나라는 한나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싶은 것이냐고 격분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비의가 한거가 주나라의 공을 양릉으로 잘못 말했다고 두둔해주며 조선의 얼굴을 봐서라도 한을 용서해주라고 하자 위나라도 분노를 참고 그렇게 해주기로 했다.
제나라는 위나라를 배려해서 대량 인근의 호편 대신 계릉을 요구했는데, 전수는 복양을 장악한 제나라에게 복수 이북의 교두보를 넘겨주는걸 꺼려서 더 큰 제양을 대안으로 제시했고, 호편에서 활약한 도도를 받는 것을 더해 제안이 성사되었다.
마지막으로 송은 주기로 한 보급품이 늦어진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적당히 왕실 수레에서 보석 떼어나서 판 돈으로 끝나는 값싼(?) 문제라 금방 넘어갔다.[17]

5.3. 위사 귀신의 저주?

내전 이후 시간이 좀 지난 기원전 320년, 몸보신을 위해 주나라를 노리던 위나라였지만, 한나라가 자신의 영향권인 주나라에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자 한 수 아래로 생각하던 한이 연릉을 먹으려는 의도를 보이고 맞먹으려든다고 여긴 위나라 지도층, 특히 위신은 극도로 격분하게 되었다.
격분한 위신은 위나라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하동의 비중을 더 늘리고자 하던 공손연의 말을 받아들여서 한의 평양을 침공할 것을 결의했고, 심지어는 평양 진공을 반대하던 경리를 잡아넣고, 전수의 무능을 빌미로 상방에서 탄핵, 공손연을 상방으로 임명한 뒤 평양를 공격하려는 폭거를 저질렀다.
그러나 최고조로 고조된 한과 위의 갈등은 어이없이 꺼져버리는데, 격분해서 한나라 침공을 강하게 주장한 위신이 위사의 귀신에게 습격당하는 허깨비를 본 뒤 급사해 버린 것이었다.
비록 위신이 위래가 매우 오래 살아서 죽을 시기가 다 된 나이였다고 하지만, 내전 직후 왕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에서 후계자인 태자가 급사한 것은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도 한순간에 자신이 평생 쌓아온 하남의 여력이 날라가는 것을 보았고, 아들의 반란과 죽음, 그리고 딸의 급사까지 본 위앵의 몸에 한계가 찾아왔다. 위앵은 엄청난 충격에 식물인간에 가깝게 되어 쓰러져 버렸고 위나라 권력의 공백기 속에 공손연이 세손 위래의 보호를 앞세우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위신이 위사의 귀신을 보고 죽었다는 점과 비비오를 제외한 위사의 난에 참가한 사령관급 인재 전원이 꽤나 비참하게 죽은 점 때문에 위신의 죽음은 위사 귀신의 저주 때문이라는 말도 돌았다. [18]

[1] 표기 사유는 하술 [2] 당시 주요인물이 아니었으나 후일 위사측으로 참전했던 이력이 밝혀졌다. [3] 이쪽 또한 후일 위사군 측에서라지만 제군을 상대로 수성전에서 선전함이 밝혀지면서 이름이 알려진다. [4] 이 자는 비비오의 수족같은 이로, 초원 출신인지라 공석상에서도 거리감 하나 없이 말을 놓고 지낼만큼의 인연을 자랑하였다. [5] 복양-범현 쪽 동원가능 전력이다. [6] 정도 쪽 동원 가능 전력이다. [7] 나라 사정과 동원가능규모가 규모인지라 제나라의 치중대 위치로 참가했다. [8] 약 5만 안쪽은 전후 반역혐의로 처단된 것이다. [9] 대다수는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왔지만 위사군 패망까지 저항한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 존재 [10] 이 위신의 자식이 바로 훗날 위밀왕이 되는 위래로, 아버지가 조선의 방계 공족 기람인 인물이다. 위신은 원 역사에서 제위를 잇지 못하고 사실상 전사하게 되어 후계구도가 위사로 변했기에 이 위신의 자식은 완전한 가상인물이다. [11] 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파하는 전 병력의 숙련도는 99, 꾸준히 군의 기강과 군비에 투자한 것은 어디 가지 않았다. [12] 이는 수명이 다 되가는 것을 느낀 제위왕이 자기가 죽은 후에도 제-위 우호관계를 통해서 제의 패권을 유지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3] 아예 다음 해에 신정이 말라죽던가, 아니면 승리와 성과를 거두던가 뉘앙스의 묘사가 붙었다. [14] 이는 공손희 또한 내심 원했는데, 그 자신이 어쩔 수 없었다곤 하지만 막상 대량을 직접 공략하는 것만은 꺼렸기 때문이었다. [15] 속으로는 위사가 놀이판의 규칙을 어겼음을 읊조렸지만 딱히 말로 전해줄 생각은 없었다. [16] 공손연은 아예 어떠한 심문방식을 선호하느냐고 대놓고 계획이 들통났음을 비꼬았다. [17] 송은 한에게 유민들을 돌려줄 것을 청했는데, 한은 피폐해진 대도시인 거양과 작은 도시인 고를 바꾸는 게 어떻냐고 역으로 제안해 연홍옥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사실 거양이 피폐해진만큼 차라리 고가 더 가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송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놓은게 문제가 된 것인데, 연홍옥은 몇십년이 지난 말년에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분개했다. [18] 전쟁과 전후처리 과정에서 몰살당한 위사군의 사령관들, 그리고 위사 귀신을 보고 죽은 위신과, 위신의 죽음으로 건강에 치명타를 맞은 위앵, 위사-위신의 내전에 깊은 트라우마를 가져서 위나라와 본인의 몰락에 엄청난 기여를 해버린 위래는 물론이고 외국에서 참전한 사람들도 상당히 고생했다. 제나라의 전영-전벽강 자매는 산동대전과 이후 이어진 조선과의 갈등 때문에 전영은 유폐, 전벽강은 멘탈이 나가서 주색잡기에 정신이 팔렸다가 죽게 되었고, 도도는 능력을 못 살리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기껏 두각을 보인 동초원대전에서 전사했다. 또 한나라의 한거는 위태로워진 나라살림 때문에 늙은 나이에도 꽤나 여러 전장에 나가서 패전을 겪었고, 이 전쟁의 최고의 승리자인 공손연은 얼마 안 가 소진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다가 진나라 공격에 참여, 조사에게 알아서 몸을 바치는 추태를 보인 끝에 진나라에서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