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21 02:52:53

후안 바티스타 힐


파일:파라과이 국장.svg
파라과이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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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 파라과이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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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a9><colcolor=#fff> 파라과이 제6대 대통령
후안 바티스타 힐 이 가르시아 델바리오
Juan Bautista Gill y García del Barrio
파일:Juan Bautista Gill.jpg
출생 1840년 10월 28일
파라과이 아순시온
사망 1877년 4월 12일 (향년 36세)
파라과이 비야리카
국적 파일:파라과이 국기.svg 파라과이
임기 파라과이 제6대 대통령
1874년 11월 15일 ~ 1877년 4월 12일
복무 파라과이 육군
1864년 ~ 1869년

1. 개요2. 생애
2.1. 대통령 이전2.2. 대통령 취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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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라과이 제6대 대통령이다. 임기 중 살해당한 유일한 파라과이 대통령이기도 하다.

2. 생애

2.1. 대통령 이전

힐은 아일랜드계 이민자 후손이며 본래 성은 맥길(McGill)이었다. 하지만, 파라과이의 독재자인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가 외국 성씨에 접두사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 것을 성을 Gill로 줄였다. 할아버지 돈 후안 미겔 힐은 파라과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파라과이판 건국의 아버지들의 일원이었다. 1854년, 아르헨티나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대를 다녔지만 대학졸업은 하지 못한 채 1863년 귀국했다. 파라과이 전쟁이 발발하자 의무병으로 입대했다. 1868년 12월 로마스 발렌티나스(Lomas Valentinas)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1869년 1월, 더이상 군인으로 복무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풀려났다.

1869년 1월 25일, 힐은 3국동맹 점령군에 임시 정부 수립을 요청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다. 힐은 친브라질파 세력에 서서 브라질의 지원을 받아 정치적 영향력을 넓혔다. 1872년 1월 9일, 브라질과의 로이사가-코테기페 조약을 채결했다. 이 결과로 브라질이 전쟁 전에 주장했던, 62,325 평방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아파 강 이북의 영토를 넘겨주게 되었다.

1870년부터 1871년까지 파라과이의 재무장관을 지냈고, 1872년에는 상원 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같은 해 3월, 자금 남용 혐의로 고발되어 의원직에서 쫓겨났다. 이에. 시릴로 안토니오 리바롤라 대통령이 반발하며 의회 해산을 명령했으나 반정부 시위로 인해 결국 본인이 사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힐을 대통령에 앉히려는 친브라질파 세력에 의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다음 대통령이 된 사람은 살바도르 호베야노스였다. 또한 요베야노스의 협력자였던 베니그노 페레이라 장군[1]에 의해 힐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2.2. 대통령 취임 이후

1874년 11월, 베르나르디노 카바예로 칸디도 바레이로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호베야노스 대통령이 실각한다. 당시 재무부 장관직에 있던 힐은 제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부통령은 사촌 동생인 이히니오 우리아르테가 되었다.

국가 경제 안정화 정책의 일환으로, 1875년 4월 22일, 담배 독점법을 제정했다. 정부는 5년 동안 모든 담배 수출을 독점하여 개인이 담배를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후 3년 동안 비누와 소금 무역에도 확대 시행되었다. 1876년 2월 3일, 전직 대통령이자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파쿤도 마차인과 아르헨티나의 재무부 장관인 베르나르도 데 이리고옌(Bernardo de Irigoyen)이 협상하여 마차인-이리고옌 조약을 체결하고 파라과이는 공식적으로 미시오네스 주와 그란차코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였다. 또한 1876년 7월 3일까지 파라과이에서 3국동맹 점령군을 철수시키는 것으로 합의했다.

1875년 12월, 카쿠페(Caacupé) 시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1877년 4월 12일 오전 10시경, 힐 대통령과 동생 에밀리오 힐 장군은 거리를 걷던 중, 괴한 3명이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 암살을 계획한 후안 고도이(Juan Silvano Godoi)[2]는 곧바로 아르헨티나로 도망쳤고 1895년에 귀국했다. 후안 고도이는 리비롤라 전 대통령의 지지자로 그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이런 짓을 꾸몄다. 동생이자 암살범인 니카노르 고도이는 죽을 때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다.

여담으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전 대통령의 미망인인 엘리사 린치 여사의 파라과이 입국금지령을 풀어주려다 실패했었다.
[1] 후에 제19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2] 괴한 3명은 후안의 동생인 니카노르와 그 외 몰라스, 고이부루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