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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회수 이남과 장강 이북'에 위치한 평야를 의미한다.고대부터 초나라, 오나라 등이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수나라 시절 대운하 공사 이전의 회수.
수나라 시절 대운하 공사 이후[1]의 회수.
현대의 회수.
2. 고대 도시
2.1. 수춘
壽春.초(楚)나라의 4번째이자, 전국시대 초나라의 마지막 수도였던 곳이다. 또한 항우가 팽성을 수도로 삼기 전까지 이 곳을 사실상 서초의 배도로써 활용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서우현이 있는 곳으로, 수춘삼반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2.2. 합비
합비라는 명칭은 한나라 시절부터 생겼는데, 合'淝'라고 표기했다가 이후에 合'肥'로 변경되었다.예전에 노주(蘆州)에 속했다가 후에 양주에 속해있던 지역이다.
합비 전투로도 유명한 곳이다.
근현대에 행정상 허페이시에 편성되었다.
2.3. 육안
춘추시대에는 육나라가 있었고, 초나라 때부터 육(六)이라 불렸다.육은 전한의 개국공신 영포가 회남왕으로 봉해졌을 때에 그 치소였는데, 후일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 살해된 뒤에는 북쪽의 수춘으로 중심이 옮겨졌다. 기원전 122년 회남국이 폐지된 후 구강군으로 편성되었다가 이듬해 한무제가 한경제의 손자 유경을 분봉하며 육안국을 세우고, 그 중심을 육에서 개칭한 육안현 (六安縣)에 두며 현 지명이 유래되었다. 육안국에는 6개의 현이 있었기에 숫자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현재에도 중심인 진안구가 나머지 6개 구역을 관장한다. 여담으로, 2007년 고속철도 공사 중에 육안왕 유경 (劉慶)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후한 대에는 여강군에 속하였고, 서진 시기에는 북쪽 60km 지점 훠추현의 화이허 강변에 그 중심인 양천현이 설치되었다. 한편 육안현은 육현 (六縣)으로도 불렸다. 당나라 시기에는 회남군의 후신인 수주 (壽州) 혹은 수춘군에 속하였고, 성당현 (盛唐縣)이 설치되었다. 북송 시기 재차 육안현으로 개칭되었고, 1118년에는 육안군이 세워져 자립하였다. 원나라 말엽에는 육안주가 설치되었고, 명나라에 들어서는 합비를 중심으로 한 여주 (廬州)에 속하였다.
근현대에 행정상 루안시에 편성되었다.
당시 3km에 달하는 육안주성이 세워졌다고 하는데, 산업화를 거치며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피허강 상류에 포쯔링 댐이 세워져 치수가 이루어졌고, 1978년 현급시를 거쳐 1999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본래 서우현 (수춘) 역시 관할하였지만, 화이난으로 이관되었다.
3. 기타
3.1. 유수구
濡須口.삼국시대의 지명 중 하나로 소호에서 흘러오는 유수와 장강의 합류점이며, 현재로 치면 안후이성 마안산 시 함산 현 서남 지역에 해당한다.
위치상 손권과 조조의 세력이 매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경계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위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할 때 매번 목표 지점이 된 곳이 이 유수구가 되었으며, 오나라에서는 이를 방비하기 위해 유수오를 세우기도 한다. 여몽이 이곳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인해 여강태수로 승진했다. 자세한 내용은 유수구 전투 항목 참고.
이 시기 오나라는 장강 주요 물길만 장악한 상태고 위가 유수구를 강하게 압박하면 수군 전력을 죄다 유수구로 집결시켜야만 수비가 가능했다. 그래서 조비의 1차 남정 당시 유수구에서 도하 협박하면서 형주 주요 거점들을 죄다 공격하니까 조비 본대의 유수구 도하를 막는 대가로 형주 거점들을 죄다 공성당하게 방치 할 수밖에 없었다. 오나라가 회남을 그렇게 먹으려고 했던 것도 이유가 있다. 바로 이런 완충지를 위해서 였던 것.
[1]
회수와 장강을 연결하는 수로의 중간에 '홍택(洪澤:훙쩌) 호수'와 '고우(高邮:가오여우후) 호수'를 연결하고 나머지 지역에 운하를 더 파도록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