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확실성의 관하여 On Certain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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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장르 | 철학 |
저자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최초 발행 | 1969년 |
언어 | 독일어와 영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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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확실성에 관하여』 (독일어 : Über Gewissheit, 원래 철자는 Über Gewißheit)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1951년에 사망하기 전 18개월 동안 4개의 개별 기간에 걸쳐쓴 메모를 편집하여 1969년에 출간한 철학 저서이다.2. 상세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대략 일 년 반 전부터 죽기 직전까지 몰두했던 특정한 주제, 즉 앎과 확실성의 문법과 관련된 고찰들로 이루어져 있다.무어는 <외적 세계의 증명>이라는 논문에서 관념주의와 회의주의에 대항하여 주장하기를, 자기는 외부 사물들의 존재를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두 손을 들어올려 오른손으로 어떤 제스처를 하면서 "여기에 한 손이 있다"고 말하고, 왼손으로 어떤 제스처를 하면서 "여기에 또 한 손이 있다"고 덧붙임으로써, 두 손이 존재하며, 따라서 외부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무어는 <상식의 옹호>라는 논문에서는 "나의 몸은 과거 어느 시간에 태어났고, 그 후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 "나는 지구 표면에서 멀리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나는 인간이다"와 같이 너무 명백하고 진부한 것들이어서 진술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이는 명제들에 대해 그것들이 참임을 확실하게 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상식적인 명제들에 대해 나는 안다고 하는 무어의 주장을 가리켜 "무어의 명제들"이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일단 두 가지 면에서 무어를 비판한다.
우선 '안다'는 말은 (정상적 상황에서는) 어떤 조건들하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실수나 무지, 의심, 확인 등의 가능성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를 (원리상)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듯한 근거들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어의 명제들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뜻이 없거나 극히 불명료한 말들이다.
또한 "나는 안다"는 무어의 단언들은 그가 이러저러한 것을 안다고 확신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 그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완전한 확신과 모든 의심의 부재를 특징으로 하는 주관적 확실성은 물론, 오류가 더 이상 생각될 수 없거나 오류의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배제되었다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객관적 확실성조차도 앎을 보장하지 않는다. 확실성과 앎은 범주가 다르다.
다음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무어가 안다고 주장한 명제들에 주목하였다. 그것들은 경험 명제이거나, 적어도 경험 명제의 형식을 띤 명제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왜 사람이 그 반대를 믿어야 할지 상상하기 어려운" 명제들이고, "먼 옛날부터 우리의 모든 고찰들의 골격에 속해 온" 확고한 것들이며, "그것을 확고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우리의 의심과 탐구의 방법에 속한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우리의 "물음들과 의심들의 운동 축", "모든 판단의 기초", "언어놀이들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 "행위와 사고의 기초", "그 위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전승된 배경"으로, "우리의 경험 명제들의 체계 내에서 독특한 논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축 명제'들이다.
그런데 이런 축 명제들의 확고한 규범적 지위는 그것들 자체가 선천적으로 지니는 본성이 아니다. 그것은 나머지 경험 명제들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학 관계를 비트겐슈타인은 집 전체에 의해 떠받쳐지는 기초벽이나, 강물의 흐름을 떠받치면서 그 흐름의 영향을 받아 위치를 옮기는 강바닥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축 명제들은 그것들을 떠받치는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하면 그 확고한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회의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축 명제들은 모든 판단의 확고한 기초이기 때문에, 그것들보다 더 확실한 어떤 것에 대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동시에 그것들은 또한 의심 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의심하는 놀이의 토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앎과 마찬가지로 의심은 언어놀이를 떠나서, 혹은 언어놀이 이전에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심은 언어놀이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들을 전제로 한다. (이 점을 회의주의자, 관념주의자, 그리고 무어는 똑같이 간과하였다.) 축 명제들은 언어놀이들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를 이루므로, 의심의 놀이는 축 명제들이 지니는 확실성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축 명제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의심은 아무런 의심도 아닐 것이다."(450절) 정당화와 마찬가지로 의심에는 끝이 있으며, 그 한계를 넘어가려는 회의주의는 무의미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