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조카인
영빈 김씨와 함께
장희빈의 모친을 모함하는 추문을 지어내고
자의대비에게 편지로 정치를 조롱하며 임금의 동정과 궁중의 비밀을 함부로 유포한 죄목으로 숙종 15년(1689)에
사형당했다. 이때
숙명공주의 아들, 즉 홍치상의 이종
사촌이자 동서인 심정보에게 죄를 덮어쓰웠는데 결국 심정보도 연루되어 폐서인되었다.
장희빈이 몰락한 후 숙종은 홍치상이 그래도 고종사촌이란 점 때문에 특별히 복관시켜주었다. 그런데 훗날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洪泰猷)는 숙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이종사촌인
영빈 김씨와 함께 홍치상이 무고하니 이런 억울함을 세상에 밝혀달라고 숙종 28년(1702)에 요청했는데, 이는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격이었다.
숙종은 '홍치상의 죄는 만 번 통분할 일이지만 늙은
공주(
숙안공주)가 하나 남은 아들을 잃은 것이 가엾어 특별히 복관해주었는데, 그 아들이 감히 멋대로 격고하여 신설할 계획을 하려 한다.'며 홍치상의 복관을 취소해 도로
서인으로 강등해버렸다. 또한 재위 36년(1710)에도 홍치상과 이사명(李師命)은 영구히 복관치 말라고 재차 명을 내렸고, 재위 43년(1717)에 명을 회수하여 이사명은 특별히 복관해주면서도 홍치상은 복관하지 않았다. 이는 홍치상뿐만 아니라, 공범이었던
영빈 김씨를
숙종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후
영조는 재위 14년(1738)에 손자 홍익삼(洪益三)의 청을 들어 홍치상을 복관해주었지만,
정조는 재위 11년(1787에) 홍치상의 사례를 왕실 내척의 폐단의 대표적인 예로 들어 이야기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