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2:19:40

호트프리트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

<colbgcolor=#006666><colcolor=#fff> 네덜란드 육군 사령관
호트프리트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
Jan Joseph Godfried, Baron van Voorst tot Voorst Jr
)[1]
파일:Luitenant-generaal_J.J.G._baron_van_Voorst_tot_Voorst_(1880-1963)_in_1948.jpg
출생 1880년 12월 29일
네덜란드 오버레이설주 캄펀
사망 1963년 11월 11일 (향년 82세)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주 피어라케르
국적
[[네덜란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왕립사관학교
직업 군인
계급 대장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전쟁 전3. 재무장 및 제2차세계대전4. 전쟁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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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군인으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군을 지휘했으며, 서열 2위[2]였다. 그는 뛰어난 전술가로 유명했는데, 현대 전술에 대하여 여러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2. 전쟁 전

1880년 12월 29일 네덜란드 오버레이설주 캄펀에서 군인 출신인 네덜란드 국가의회 국회의장 얀 요세프 호트프리트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3]와 안나 크레메르스[4] 사이에서 5번째로 태어났다.

1901년 왕립사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후 하를럼의 보병 연대에 중위로 임관했다. 1903년 철도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 하를럼역을 지킨 유일한 중위였다. 그 후 1907년 빌헬미나 여왕의 개인 보좌관이 되어, 그녀가 해외 순방을 할 때에 동반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네덜란드군이 동원되면서, 다양한 계급을 맡게 되었다. 이 경험과 더불어 독일의 슐리펜 계획에 대한 걱정이 일자, 독일 전쟁 계획에 있어 네덜란드 림뷔르흐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 및 노르웨이어로 번역되었다. 1920년에 네덜란드 총참모부에 참가하였으며, 제네바 군축회의에서 네덜란드 대표단을 맡았다.

대공황의 여파로 발생한 1934년 암스테르담 폭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이 때가 네덜란드군이 최초로 장갑차를 활용한 때였다. 1935년에는 자르 국민투표를 감독하기 위해 파견된 네덜란드군을 지휘하였다.

3. 재무장 및 제2차세계대전

1920년대와 30년대 네덜란드 정치권에 팽배한 반전주의 사상을 순진하다며 비판하였다[5]. 1936년에는 독일의 재무장에 관한 책을 집필하여, 독일의 꿍꿍이를 일찌감치 눈치채어 경고하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네덜란드 정치인들 또한 다가오는 분쟁에 의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네덜란드군이 허겁지겁 재무장을 하던 때에 상관인 총사령관 이자크 레인더르스의 의견을 격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독일군의 기계화 및 전격전에 대하여 경고하였지만, 레인더르스는 전쟁은 긴 정치 외교적 긴장을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레인더르스의 의견이 수용되었지만, 국방장관 아드리안 다익스호른과 갈등을 겪고 사임[6]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네덜란드군 총참모부에 이미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 형제가 2명[7]이나 있었는 데다 가톨릭 신자였기에[8] 다익스호른은 총사령관에 헨리 빙켈만 대장을 임명하게 된다. 빙켈만은 호트프리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은 내부에서 티격태격 하며 시간을 모두 허비해버렸고, 결국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진격해왔을 때에는, 네덜란드군은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호트프리트는 흐레버베르흐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고, 최종적으로 네덜란드 서부로 철수해야만 했다. 독일 공군 로테르담을 폭격으로 파괴하고 다른 도시들 또한 폭격하겠다고 협박하자 빙켈만에게 항복을 권유한다.

4. 전쟁 후

네덜란드 침공이 막을 내리자, 호트프리트는 나치에 부역하기를 거부했고, 이에 따른 대가로 전쟁포로가 되어 전쟁의 남은 6년동안 독일의 포로 수용소에서 지냈다 [9]. 전쟁 후 네덜란드로 돌아왔으며, 여러 군 및 공무직을 맡았다. 그 후 1960년 그의 80세 생일에 대장으로 명예 진급하였다.

[1] 얀 요세프 호트프리트, 바론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 유니요르 [2] 1위는 헨리 빙켈만. [3] Jan Joseph Godfried, Baron van Voorst tot Voorst Sr.로, 아들과 이름이 같아 Sr.가 붙는다 [4] Anna Cremers [5] 후에 이 시대가 네덜란드 국방이 최악이었던 시대였다고 서술하였다. [6] 명예 전역 [7] 다른 이는 남동생 헤르만 판 보르스트 토트 보르스트 (Herman Franciscus Maria baron van Voorst tot Voorst) [8] 당시 네덜란드 정계는 개신교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국민 대부분 또한 개신교 신자였다. [9] 동생 헤르만 또한 포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