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로 자는 백중(伯重).
옹주 경조군 출신으로 40세 전후로 정방선생을 따라 유학을 해 사람들은 그 당시에 그가 정방선생의 술법을 공부했을 것이라 했으며, 부인을 얻었지만 아들이 없었다고 한다.
195년에 이각, 곽사 등의 싸움으로 경조윤, 우부풍, 좌빙익 등 삼보 일대가 초토화되어 2년 만에 30만 가구가 전멸되는 삼보의 난이 일어난 이래로 211년에 삼보에서 또다시 난리가 벌어지자 정방선생과 함께 한중으로 갔으며, 한중이 무너질 때 정방선생과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백성들을 따라서 업으로 갔지만 도중에 유행병에 걸린 아내를 잃었다가 220년에 다시 낙양으로 옮겼지만 다시는 아내를 얻지 않았으며, 홀로 길 옆에 녹전[1]을 깔고 밥상을 하나 펼쳐놓은 다음에서 밥상에서 음식을 먹고 잠을 잤다. 낮에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가 밤이 되면 별자리를 관찰하면서 속으로 글을 읽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평 연간에는 이미 나이가 90이지만 고작 4, 50대로 보였다고 하며, 현의 관리가 홀로 사는 노인이라 해 하루에 5되의 곡식을 줬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태줬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일부러 사람들에게 얻어먹지 않았다.
그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따뜻한 옷을 입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 2년 후에 죽었다고 한다.
[1]
바닥에 까는 납작한 벽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