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호딘카의 비극 Ходынская трагедия Khodynka Trage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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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발생일 | 1896년 5월 30일 | ||
발생 위치 |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호딘카 들판 | |||
유형 | 다중밀집사고 | ||
원인 | 과밀화 | ||
인명
피해 |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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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명 이상 | |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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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명~20,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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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6년 5월 30일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인근의 호딘카 들판에서 일어난 대규모 압사 사고. 세계사 기준으로 최악의 10대 압사 사고로 손꼽힌다.2. 상세
1896년 5월 26일 크렘린 궁전 안쪽의 우스펜스키 성당에서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이 열렸으며 4일 뒤 호딘카 들판에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잔치가 큰 규모로 열릴 예정이었다.참가자들에게 음식과 기념품이 지급된다는 소문에 새벽에만 무려 5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모였는데 모여든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150개 장소에 뷔페가 차려졌다. 뷔페에선 빵과 소시지, 프레첼, 맥주 3만 통과 벌꿀술 1만 통이 제공됐으며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애나멜 장식의 대관식 기념 잔이 참가자들에게 배포됐다.[1] 10개 장소에 대형 임시 무대도 설치되어 음악과 연극이 펼쳐졌다. 점심이 끝나고 오후 2시엔 니콜라이 2세가 축제 장소에 와 국민들과 어울릴 예정이었다. 문제는 50만 명에 달하는 인원들을 통솔하기 위한 경찰은 고작 1,800명 밖에 되지 않아 인원이 전혀 통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이 너무 많아 음식이 부족할 수 있다거나 참가자들에게 경품을 추첨해서 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모여 지쳐 있던 사람들은 음식이 있는 식탁으로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문제는 당시 대관식 기념 축제를 급하게 준비하느라 호딘카 들판은 공사가 덜 된 상태였다는 점이다. 호딘카 들판은 원래 러시아 제국군이 군사훈련을 하며 참호를 팠던 곳이라 여기저기 경사가 있고 높낮이가 심해 넘어지기 쉬웠으며 우물이 있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달려나가던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고 넘어지며 뒤엉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직 메워지지 않은 참호에 빠진 사람들도, 우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찰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을 통제해 보려고 했으나 사람의 수에 비해 경찰이 너무 적어 역부족이었다. 결국 사람들끼리 엉킨 와중에 압사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태가 진정됐을 땐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한 뒤였다.
이 사고로 최소 1,389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기록에 따라 사망자 수는 4,000명대, 부상자 수는 2만 명까지 오르기도 한다. 사망자 중에서는 현장을 간신히 빠져나왔으나 내부 장기 손상이 심해 사고 현장 바깥에서 사망한 사례도 많았다. 이 사고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압사 사고로 기록됐다.
3. 사고 이후
사고가 일어난 뒤에도 축제는 계속됐다. 시신들을 급히 치우고 오후 2시가 되어 니콜라이 2세와 황후가 찾아오자 시민들은 니콜라이 2세와 황후를 반겼다.이 참사가 벌어진 후 황제와 황후는 숙부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매제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에게 다음 일정인 프랑스 대사관의 대관식 무도회에 참석해야 할지 물었다. 이에 알렉산드르 대공은 다음 일정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세르게이 대공은 무도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프랑스와의 동맹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르게이 대공의 주장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게, 당시 프랑스 대사관이 주최한 무도회는 단순한 연회가 아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 관계를 선전하고 동시에 프랑스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프랑스 측이 반 년 이상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행사였다. 이런 행사에 불참하는 것은 러시아에게 외교적으로 심각한 손해인 건 사실이었다. 결국 황제 부부는 세르게이 대공의 주장을 따라 무도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세르게이 대공의 말을 따른 것은 결과적으로 악수였다. 사람 천여명이 죽었는데도 그대로 일정을 진행했다는 사실에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황실에 대한 여론이 나빠진 것이다. 그나마 황제와 황후는 병원을 돌아다니며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유가족에게 황실 비용으로 1,000 루블을 위로금으로 주고 장례식 비용도 황실 비용으로 처리하여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 사건 이후 반정부 세력은 니콜라이 2세를 '피의 니콜라이(Николай Кровавый)'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그래도 니콜라이 2세가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한 편이었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황제에 대한 여론이 바닥으로 추락하지는 않았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바간코보 공동묘지(Ваганьковское кладбище)에 매장되었고 공동묘지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이후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장례식에서도 수백명이 압사하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는데, 이때 모두가 호딘카의 비극을 떠올리며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고, 소련 당국은 이 내용이 새어나가지 않게 엄중히 검열하였다.
사건 현장인 호딘카는 현대에는 스포츠 경기장과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4. 기타
레프 톨스토이는 사고를 다룬 단편소설 '호딘카' 를 썼다.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 역시 당시 여정을 기록한 <해천추범>에서 이 사고 소식에 대해 간단히 기록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대관식에 참석했던 이홍장은 "중국의 황제였다면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1]
애나멜 장식 기념 잔 속에 추첨으로 금화가 들어있다는 잘못된 정보가 퍼져 사람들이 밀려들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