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루이스 베닝 Henry Lewis Benn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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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4년 4월 2일 |
미국 조지아주 컬럼비아 카운티 | |
사망 | 1875년 7월 10일 (향년 61세) |
미국 조지아주 콜럼버스 | |
복무 | 아메리카 연합군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준장 |
복무 기간 | 1861~1865 |
학력 | 프랭클린 칼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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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조지아주 컬럼비아 카운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프랭클린 칼리지를 졸업하고 조지아주 콜럼버스로 이주해 변호사활동을 했다. 남부 부농출신이라 노예제 해방을 반대했고 남부의 독립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1860년 링컨이 당선되고 나서 조지아 대표로 남부의 연방탈퇴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1861년 남군에 입대해 대령계급으로 제17조지아보병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이후 버지니아군 로버트 툼즈 예하로 남북전쟁에 참가했다. 다만 전쟁이후 남부의 징병제에 대해 비판해 군법회의에 회부될 뻔했지만 툼즈의 변호로 무마되었다. 앤티텀 전투당시 번사이드 다리를 방어해 수뇌부의 신뢰를 회복했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텍사스군의 존 벨 후드의 사단예하에 편입되어 게티즈버그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하지만 게티즈버그 전투이후로 남군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던 중 카마우가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제임스 롱스트리트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차가운 대답만 받았다. 이후 테네시주 채터누가 전투에 참가했고 버지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총상을 입었다. 피터즈버그 공방전에서 패배한 후 로버트 E. 리와 함께 철수했으나 상심하고 북군에게 항복했다.
전후 콜럼버스로 돌아왔으나 재산은 다 날아갔고 가난하게 살다가 1875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