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주요 절멸수용소 |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 트레블링카 | 베우제츠 |
소비보르 | 헤움노 | 마이다네크 |
↑ 위장된 헤움노의 '성 캠프' 장원. |
↑ 헤움노 추모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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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Ośrodek zagłady Chełmno ned Nerem, Obóz zagłady w Chełmno nad Nerem (SS-Sonderkommando Kulmhof) ( 폴란드어)
- Das Vernichtungslager Kulmhof ( 독일어)
- Chełmno extermination camp ( 영어)
이 수용소의 독일어 명칭은 쿨름호프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 Kulmhof)인데 폴란드를 점령한 이후 나치 당국은 수용소가 위치한 헤움노를 독일어 명칭인 '쿨름호프(Kulmhof)'로 고쳤기 때문에 헤움노 절멸수용소 역시 '쿨름호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정보를 찾다가 쿨름호프라는 이름을 찾으면 바로 헤움노 절멸수용소이다.
2. 운영 역사
↑ 1944년 3월 제 3제국. 동쪽의 노란색 영토가 바르테란트 제국대관구,[4] 영역 내 색칠되지 않은 지역은 폴란드 총독부다.
↑ 바르테란트 대관구지도자(Gauleiter) 및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아르투어 그라이저(Arthur Greiser).
헤움노 수용소 건설지시 등 홀로코스트에 깊게 관여했다는 점과 함께 다수의 전쟁포로를 처형하고 현지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했다는 혐의를 받아 1946년 폴란드 최고국가재판소(Supreme National Tribunal)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부터 나치는 유대인 학살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이 폴란드 이동의 새로 점령한 점령지를 돌아다니며 대규모 총살을 통해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동안 게토에 수용되거나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지던 기존 점령지의 유대인들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바르테란트 대관구의 통치자였던 아르투어 그라이저(Arthur Greiser)는 바르테란트가 '나치 인종계획의 훈련장'이 되어야 한다며 나치의 대관구 지휘자들 중에서 유대인 절멸계획에 가장 먼저 발벗고 나섰고, 1941년 10월 경, 자신의 통치하에 있던 약 38만의 유대인 중 10만명을 노동 부적합 인원으로 보고 이들을 학살하게 해달라고 하인리히 힘러에게 건의했다. 이때, 희생자들을 직접 찾아가 학살하는 것이 아닌 희생자들을 하나의 장소에 불러 모은 뒤 학살과 시체 처리를 동시에 수행하는 절멸수용소의 아이디어가 제시되었고 이에 따라 나치 최초의 절멸수용소 건설이 계획되었다.
↑ 폴란드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확대 가능. 바르테란트 관구와 헤움노 절멸수용소를 확인하기 바란다. 범례로 표시되지 않은 하얀 두개골은 대규모 총살이 일어난 곳 중 몇 곳을 표시한 것이다.
1941년 11월부터 수용소 부지 물색이 시작되었고 대도시 우치를 포함해 바르테란트 관구에서 특히 유대인이 많은 지역 한 가운데 있던 헤움노 나드 네렘 마을을 수용소 부지로 잡았다. 수용소 구성은 T-4프로그램에서 바르테란트 지역의 장애인 학살을 지휘했던 헤르베르트 랑에(Herbert Lange)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T-4프로그램 당시 가스바겐[5]을 이용한 대량학살을 떠올리며 새로 지어질 절멸수용소에서 가스바겐으로 학살을 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는 베를린에 요청하여 T-4프로그램 당시 쓰이던 가스바겐 중 세대를 얻어냈고, 헤움노 마을의 작은 성 하나를 개조해 위장된 장원으로 꾸미고 가스바겐의 '승강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장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 한가운데에 시체 매장터(숲 캠프)를 만들고 이곳에 유대인 인부를 상주하게 했다.
첫 이송은 1941년 12월 8일부터 주변의 수많은 작은 마을에서 이루어졌다. 이듬해 1월 중순까지 한달동안 약 8000명의 유대인과 집시가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1942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직할령 최대의 게토인 우치 게토[6]에서 이송이 시작되었다. 우치 게토에서 절멸수용소 이송으로 줄어든 인구는 독일과 체코 지역에서 보내진 유대인들로 다시 채워졌다. 1943년 3월 아르투르 그라이저는 바르테란트를 '유대인으로부터 자유로운 구역(Judenfrei)'으로 선포했다. 이때까지 헤움노에서 학살된 유대인, 집시 수는 약 15만명 정도로 추측되는데, 바르테란트의 나머지 유대인들은 우치 게토에 마지막까지 남은 유대인들을 제외하고 모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보내졌다. 필요한 노동력을 제외하고 바르테란트의 유대인이 모두 학살된 뒤였기에 1943년 4월 나치는 수용소 폐쇄를 결정한다.[7] SS는 '성 캠프'를 폭파했고 나머지 장원에 있던 주요 건물들도 철거해 증거를 인멸했다. 그리고 나치군이 카틴 학살의 현장을 발견한 직후였기 때문에 헤움노에서도 다른 절멸수용소와 마찬가지로 매장된 시신을 다시 꺼내어 모두 소각했다. 불태워진 재는 근처의 바르타 강[8]에 버려졌다.
1944년 우치 게토에는 마지막 유대인 노동력으로서 약 7만의 유대인이 남아있었는데, 나치는 1944년 6월 남은 유대인들마저 모두 처형하기로 하고 45,000명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나머지 25,000명은 이미 폐쇄된 헤움노 수용소를 다시 가동시킨 뒤 이송했다. 이미 성 캠프의 주요 시설을 파기한 뒤였기에 학살의 주요 과정은 모두 시체를 처리하던 '숲 캠프'에서 일어났다.
3. 구조, 학살 과정
헤움노의 운영 역사도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수용소가 세워진 1941년 12월부터 처음 폐쇄되었던 1943년 4월까지, 그리고 1944년 6월 다시 운영되어 1945년 1월 완전히 폐쇄할 때까지로 나누어진다.수용소는 하나의 공간으로 완결된 형태는 아니었고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하나는 희생자들을 속여 가스 밴에 타도록 하는 '성 캠프(Schlosslager 또는 Castle Camp)'지역,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학살된 유대인들을 매장하거나 소각하는 '숲 캠프(Waldlager)'지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서로 약 4km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헤움노 수용소는 건설되었다기보단 기존의 구조물, 지역들을 절멸수용소로 구성한 것에 가까웠다. 또한 헤움노 수용소는 별도의 가스실을 갖추지 않고 3대의 가스바겐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가스 학살을 가장 먼저 선보인 수용소 중 하나였지만 끝까지 처음의 방식을 고수했기에 대형 가스실이 새로 지어지던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수용소보단 학살의 속도가 더뎠다.[9]
↑ 수용소 지도. 확대 가능
처음 헤움노 수용소에는 철로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10] 희생자들은 먼저 수용소에서 14km떨어진 코워 역에서 내린 뒤 대형 트럭을 타고 수용소의 성 지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트럭이 바로 오진 않는 경우도 많아서 유대인들은 트럭이 오기 전에 코워 역 근처의 시나고그에서 대기했다. 그러나 마을 행정청에서 유대인들을 자신의 구역에 대기시키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바람에 1942년 3월부터 유대인들은 수레에 실려 협궤를 따라 6km떨어진 포비에치에(Powiercie) 마을로 이동한 뒤 이곳의 제분소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트럭에 실려 '성 캠프'로 향했다.
'성 지역'은 말 그대로 개인이 소유하는 작은 성 같은 곳이었는데, 성 주위에는 장원처럼 교회, 풍차 등도 있었다. 이곳에 있던 SS들은 희생자들이 도착하면 마치 장원의 주인인 양 행세하면서, 유대인 일부는 위생검사와 샤워를 마친 뒤 이곳에서 일하게 되고 나머지 역시 샤워를 마친 뒤 오스트리아 쪽으로 보내져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샤워실이 성 안에 있지는 않기 때문에 트럭을 타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희생자들은 성으로 들어와 탈의한 뒤 좁은 복도를 따라 성 밖에 대기하고 있던 트럭으로 향했다. 복도에는 '목욕하는 곳으로', '의무실' 등의 위장된 간판이 붙어있었고 희생자들에게는 비누가 주어졌기에 희생자들은 안심하고 가스 밴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체하는 사람이 있으면 세명의 폴란드인 부역자가 채찍을 휘두르며 희생자들을 재촉했다고 한다. 희생자들이 트럭에 가득 차면 SS는 짐칸 문을 닫았고 운전자는 배기가스가 나오는 호스를 밀폐된 짐칸으로 연결한 뒤 엔진을 공회전시켜 희생자들을 질식하게 했다. 약 20분 뒤 희생자들이 모두 사망하면 운전자는 트럭을 4km로 떨어진 '숲 캠프로' 가져갔다. 그곳에서 대기하던 존더코만도[11]들은 트럭에서 시체를 꺼내 미리 파인 구덩이에 넣었고 트럭을 청소한 뒤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 '성 캠프' 내부.
다음은 1942년 6월 5일 헤움노 수용소에서 베를린의 가스바겐 운영자 발터 라우프(Walter Rauff)에게 보낸 서한으로, 당시 헤움노에서 운영되던 가스바겐의 개선해야 될 점을 보고했다. 다분히 전문적이고 행정적인 '은유' 속에서 가스바겐의 끔찍함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곳에는 총 7개의 요구사항 중 4개를 기술한다. 전문을 확인하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를 참조바란다.
1942년 6월 5일 베를린.
제국 기밀 업무(Geheime Reichssache)
현재 사용중이며 생산중인 특수차량(spezialwagen)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
1941년 12월 이래로 세 대의 특수차량을 이용해 97,000명을 처리했고 차량에 별다른 결함은 없었음. (중략) 이전의 사례들로 판단컨데, 다음의 사항들이 개선되면 좋을 것임.
1) 과잉압력을 막고 일산화탄소가 빠르게 퍼지게 하기 위해 차량 후방 벽면의 위에다 10x1cm의 구멍을 뚫을 필요가 있음. 압력 과잉은 밖에서 이 구멍을 막는 덮개를 여닫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음.
2) 통상 적재 시 평방미터 당 9~10명임. 사우러(Saurer) 사[12]의 더 커다란 차량에도 그리 많이 적재하진 않음. 과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적재 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때 차량 안정성에 문제가 있음. 적재공간의 축소가 필요해 보임. (중략) 이를 위해 지금껏 했던 것처럼 화물의 양을 줄여선 안됨. 화물의 양이 줄면 남는 공간에도 일산화탄소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가동 시간'이 늘어나게 됨. 반면 적재공간이 줄면, 공간이 완전히 화물로 가득찬 상태이므로 '가동 시간'을 줄일 수 있음. 제작자들과의 회의에서 적재공간을 줄일 경우 무게중심에 문제가 생겨 앞 차축에 과부하가 걸릴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사실 적재공간의 화물들이 가동 중에 언제나 뒷문으로 몰리기 때문에 무게중심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음. 따라서 앞 차축 과부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음.
4) 차량 내부 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밀봉된 배수구를 설치해야 함. 배수구의 지름은 20~30cm로 하고 여기에 사이펀을 설치해 '가동 중에' 액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 함. 파이프 위에는 거름망을 설치해 오물에 의해 막히는 것을 방지해야 함. 큰 오물들은 가동 후 차량을 청소할 때 배수구의 뚜껑을 열어 제거할 수 있음. 적재공간의 바닥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도록 해서 오물들이 중앙으로 모아져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함.
6) 적재공간 내 램프를 더 철저하게 보호해야 됨. 램프에 철망을 씌워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함. 램프는 필요 없다고 없애버리자는 말도 있음. 하지만 관찰 결과, 문이 닫히려 할 때 깜깜해지기 시작하면 화물들은 언제나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기에 문을 닫기 어려워짐. 이는 화물들이 어둠 속에서 조금의 빛이라도 드는 곳으로 향하려 하기 때문임. 또한 어둠으로 인한 공포로 화물들이 소음을 일으킴. 따라서 가동 초기엔 램프를 켜 두는 것이 더 적절함. 또한 야간 운영과 차량 내부 청소에도 도움이 됨.
상기한 사항들은 수리를 위해 입고될 경우에만 적용될 것임. 이미 주문한 10대의 사우러(Saurer) 사 차량들에는 가능한 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임. 제작사는 회의 때 사소한 몇가지를 제외하고 개조가 당장 이루어지긴 어렵다고 함. 따라서, 10대 중 최소한 한대의 개조를 위해 다른 제작사를 알아본 결과 호엔마우트에 있는 회사가 적격이라고 제안함. 현 상황에서 이 차량의 개조엔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임.
II D 부서장 SS 상급돌격대지도자 발터 라우프(Walter Rauff) 귀하.
서신 전문
독일어 원문
제국 기밀 업무(Geheime Reichssache)
현재 사용중이며 생산중인 특수차량(spezialwagen)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
1941년 12월 이래로 세 대의 특수차량을 이용해 97,000명을 처리했고 차량에 별다른 결함은 없었음. (중략) 이전의 사례들로 판단컨데, 다음의 사항들이 개선되면 좋을 것임.
1) 과잉압력을 막고 일산화탄소가 빠르게 퍼지게 하기 위해 차량 후방 벽면의 위에다 10x1cm의 구멍을 뚫을 필요가 있음. 압력 과잉은 밖에서 이 구멍을 막는 덮개를 여닫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음.
2) 통상 적재 시 평방미터 당 9~10명임. 사우러(Saurer) 사[12]의 더 커다란 차량에도 그리 많이 적재하진 않음. 과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적재 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때 차량 안정성에 문제가 있음. 적재공간의 축소가 필요해 보임. (중략) 이를 위해 지금껏 했던 것처럼 화물의 양을 줄여선 안됨. 화물의 양이 줄면 남는 공간에도 일산화탄소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가동 시간'이 늘어나게 됨. 반면 적재공간이 줄면, 공간이 완전히 화물로 가득찬 상태이므로 '가동 시간'을 줄일 수 있음. 제작자들과의 회의에서 적재공간을 줄일 경우 무게중심에 문제가 생겨 앞 차축에 과부하가 걸릴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사실 적재공간의 화물들이 가동 중에 언제나 뒷문으로 몰리기 때문에 무게중심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음. 따라서 앞 차축 과부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음.
4) 차량 내부 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밀봉된 배수구를 설치해야 함. 배수구의 지름은 20~30cm로 하고 여기에 사이펀을 설치해 '가동 중에' 액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해야 함. 파이프 위에는 거름망을 설치해 오물에 의해 막히는 것을 방지해야 함. 큰 오물들은 가동 후 차량을 청소할 때 배수구의 뚜껑을 열어 제거할 수 있음. 적재공간의 바닥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도록 해서 오물들이 중앙으로 모아져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함.
6) 적재공간 내 램프를 더 철저하게 보호해야 됨. 램프에 철망을 씌워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함. 램프는 필요 없다고 없애버리자는 말도 있음. 하지만 관찰 결과, 문이 닫히려 할 때 깜깜해지기 시작하면 화물들은 언제나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기에 문을 닫기 어려워짐. 이는 화물들이 어둠 속에서 조금의 빛이라도 드는 곳으로 향하려 하기 때문임. 또한 어둠으로 인한 공포로 화물들이 소음을 일으킴. 따라서 가동 초기엔 램프를 켜 두는 것이 더 적절함. 또한 야간 운영과 차량 내부 청소에도 도움이 됨.
상기한 사항들은 수리를 위해 입고될 경우에만 적용될 것임. 이미 주문한 10대의 사우러(Saurer) 사 차량들에는 가능한 한 개선이 이루어질 것임. 제작사는 회의 때 사소한 몇가지를 제외하고 개조가 당장 이루어지긴 어렵다고 함. 따라서, 10대 중 최소한 한대의 개조를 위해 다른 제작사를 알아본 결과 호엔마우트에 있는 회사가 적격이라고 제안함. 현 상황에서 이 차량의 개조엔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임.
II D 부서장 SS 상급돌격대지도자 발터 라우프(Walter Rauff) 귀하.
서신 전문
독일어 원문
1944년 운영이 재개되었을 때는 수용소로 연결되는 협로가 수리되어 있었기에 학살 시퀀스가 조금 바뀌었다. 먼저 성 캠프에 도착한 희생자들은 장원의 교회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다음날 트럭에 실려 숲 캠프로 향했다. 두번째 운영기간 때 숲 캠프에는 두개의 막사를 지어놓았는데, 이는 이곳을 노동 수용소로 보이게 하여 희생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이후의 과정은 성 캠프에서와 같았다. 희생자들은 역시 노동 전에 위생검사를 받고 목욕을 해야 한다고 듣고 막사에서 옷을 탈의한 이후 막사 밖에 '목욕하는 곳으로'라고 적힌 위장된 간판을 따라 대기하고 있던 가스 밴으로 걸어들어갔다.
↑ 헤움노 수용소 근방에서 불태워진 채 발견된 마기루스 도이츠(Magirus-Deutz)의 트럭. 이 사진에 등장하는 트럭은 헤움노의 가스바겐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가스바겐에 사용되던 것과 동일한 차체 모델일 뿐, 실제 가스바겐이 아닌 단순한 가구 수송용 트럭이다. 헤움노의 '진짜' 가스바겐의 사진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다.
수용소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에 근무하는 존더코만도 수는 적었다. '성 캠프'에는 15명의 존더코만도가 근무하면서 희생자들의 소지품을 분류했고 '숲 캠프'의 존더코만도(발트코만도)들은 약 100여 명 내외였다. 아우슈비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존더코만도들도 주기적으로 처형되고 새로운 인원으로 교체되었다.
4. 폐쇄
헤움노에서의 학살은 1944년 10월경 끝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소련군이 당도할 때까지 시체의 소각과 증거 인멸에 집중했다. 11월 작업이 거의 완료되었을 때 당시 헤움노에 수용되었던 약 130명의 존더코만도 중 80명이 처형되었다. 남은 존더코만도들로 나머지 작업을 계속하면서 SS는 존더코만도를 줄여 나갔고 세대의 가스바겐도 하나 둘 베를린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945년 1월 18일 소련군 당도 이틀 전 마지막 47명의 존더코만도들을 모두 처형했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마지막 처형 때 존더코만도 두명이 총을 맞고도 살아남아 탈출했다.5. 희생자 수, 생존자
헤움노 수용소에 관한 자료도 꽤나 철저히 파기되었기 때문에 희생자 수를 확정할 수 없는데, 이곳은 그 편차가 다른 곳보다 특히 심하다. 1940년 당시 바르테란트 대관구의 유대인 수는 약 38만 명이었는데,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헤움노에서 살해당했는지는 논란거리다. 헤움노 수용소의 설립 목적을 고려하면 바르테란트의 유대인 대부분이 이곳에서 사망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바르테란트의 유대인 중 상당수가 헤움노가 아닌 아우슈비츠 등으로도 보내졌다. 그런 한편으로 바르테란트에 거주하지 않는 유대인들도 이곳으로 보내졌기에 희생자 수를 추정하는 건 더욱 어렵다.헤움노에서의 사망자 수를 어림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 하나는 코어헤어 보고서(Korherr Report)이다.[13] 이 보고서에 따르면 바르테란트에서 1942년 12월 31일까지 살해된 유대인 수는 14만 5301명이었다. 헤움노는 1943년 4월까지, 1944년 6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학살을 지속했기 때문에 사망자 수는 이것보단 훨씬 많아서 헤움노 희생자 수치로서 가장 낮게 언급되는 건 15만 2천명이다. 하지만 두번째 운영기간엔 수만의 우치 게토 유대인이 헤움노로 이송된 것이 확실한 만큼 희생자 수를 18만~20만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홀로코스트 백과사전에 따르면 헤움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숲 캠프에서 일하던 발트코만도 7명 뿐이다. 이 중 5명은 1942년 겨울 탈출했고 나머지 두명은 1945년 1월 18일 수용소가 완전히 폐쇄되면서 남은 존더코만도들을 모두 처형할 때 머리에 총을 맞고도 살아남았다. 이 두 명 중 한 명이 이 쉬몬 스레브르니크(Szymon Srebrnik)인데, 그는 1942년 1월 탈출한 미하우 포드흘레브닉(Michał Podchlebnik)과 함께 1985년 만들어진 클로즈 란츠만 감독의 대작 다큐멘터리 쇼아[14]에 나와 헤움노에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당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 생존자 중 한분인 시몬 스레브니크. 사진은 클로즈 란츠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쇼아에 나온 모습이다.
1943년 스레브니크가 13세이던 때, 우치 게토에 살던 그는 아버지와 시나고그에 가던 중 SS 한명이 아버지를 거리 위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고 한다. 1943년 겨울 그는 헤움노에서 매장된 시체를 꺼내 소각하는 인원으로서 잡혀갔고 그의 다리는 4인치 길이의 족쇄로 묶였는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매일 24시간 족쇄를 차고 있어야 했다. 1944년 6월 수용소 운영이 재개되자 가스 밴에서 시체를 꺼내고 불태운 뒤 재를 강에다 떠내려보내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희생자들의 물품을 모으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서류를 발견하고 어머니도 학살당했다는 걸 알게된다.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SS들은 그에게 자주 노래를 시켰는데, 화장된 재를 강에 버리러 갈 때면 SS는 그에게 프로이센의 군가[15]를 가르치고 부르게 했다고 한다. 또한 SS는 그와 다른 수용자 간에 높이뛰기, 달리기 시합을 하게 했는데, 그는 살아남기 위해 매번 이겼고 패배한 다른 수용자들은 그대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는 SS의 '광대'로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도 결국 살아남을 순 없는 운명이어서 47명의 수용자들이 마지막으로 처형될 때,[16] 총에 맞기 직전 엄청난 공포로 몸을 심하게 떤 덕분에 총알이 두개골을 비껴가 그대로 목을 관통했기에, 치명상을 입었지만 즉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처형이 모두 끝나고 SS가 떠난 뒤 그는 필사적으로 주변 폴란드인 농가로 기어갔고 농가에 도착한 뒤 쓰러졌다. 폴란드인 농민은 족쇄를 제거하고 48시간 뒤 당도한 소련군의 군의관에게 보냈다. 그는 바르샤바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군의관이 몇시간 밖에 살지 못할거라고 했음에도 결국 살아남았다. 전후 1945년 우치에서 진행한 헤움노 재판 때 핵심 증인으로 참여하였고 1940년 말 이스라엘로 이주한 뒤 이스라엘군에 지원해 복무했다. 이후 1961년 아이히만 재판과 1962~65년까지 서독에서 진행한 헤움노 재판 때에도 증인으로 참여해 주요 나치 전범 여럿에게 유죄를 받도록 했다.
6. 전후, 재판
초대 수용소장 헤르베르트 랑에는 베를린 전투에서 사망했다. 전후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헤움노의 존재를 알고있던 폴란드 인민정부는 1945년 5월 24일부터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책임자들이 도주한 가운데 가스바겐 운전사 헤르만 기엘로프(Hermann Gielow), 부수용소장 발터 필러(Walter Piller)만을 잡아 심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헤움노의 경우는 증거 인멸이 다른 절멸수용소보다도 철저해서 당시엔 잡을 수 있는 증거가 살아남은 증인들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일부 남아있던 수용소의 울타리는 전후 현지인들이 현장 증거의 중요성을 모르고 모두 빼 갔고 코워의 파괴된 시나고그에 있던 희생자들의 5000여 개에 달하는 신발도 시나고그 철거 과정에서 모조리 버려지는 등 그나마 남아있는 증거들을 잡을 기회마저 폴란드/소련 정부의 실수로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우치 게토의 기록을 뒤지던 중 헤움노 이송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고 생존자의 증언이 자료와 상당부분 일치하면서 재판부는 증거를 어느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1946년엔 두번째이자 마지막 수용소장이던 한스 보트만이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구류 중에 자살했다. 재판부의 자료 증거는 완벽하지 않았기에 헤움노의 희생자 수로 무려 35만을 인용했는데, 이에 따라 기엘로프와 발터 필러도 곧 사형을 선고받고 49년엔 발터 필러, 51년엔 기엘로프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남은 간부, 경비병에 대한 재판은 1962년에야 이루어졌다. 두번째 재판은 서독의 본에서 이루어졌는데, 13명이 기소되어 7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최고형을 받은 건 또다른 가스바겐 운전자였던 구스타프 랍스(Gustaw Laabs)로 15년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는 13개월~1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시간이 많이 흐른데다 전범에 대한 서독의 법적 기준도 종전 직후에 비해 많이 완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저지른 죄상에 비해 다소 약한 처벌을 받게되었다.
한편 전쟁이 끝난 뒤, 희생자 중 한명의 독일인 친척이 성 캠프가 있던 자리에 추모석을 세워 주었다. 그 뒤, 유대인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가기 전에 내렸던 코워 역, 그리고 숲 캠프에도 추모석이 세워졌다. 1964년 폴란드 인민정부는 이 곳을 추모 박물관으로 만들었고 1990년에는 이곳에 희생자들을 위한 영묘가 만들어졌다. 영묘의 한 면에 희생자들의 영령이 살아남은 사람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외치고 있다.
"우리는 코워와 돔비에 사이의 지역에서 노인부터 갓난아기까지 이곳으로 보내졌습니다. 우리는 숲으로 보내져서 가스로 학살당하거나 총살당하고 불태워졌습니다... 미래의 형제들이 우리를 죽인 학살자들을 처벌해주길 바랍니다. 우리가 겪은 끔찍한 일의 목격자분들, 여기에서 살아 나가신 분들. 부탁컨데 이 학살극을 전 세계에 알려 주십시오."
"Wzięto nas od starca do niemowlęcia między miastem Koło a Dąbie. Wzięto nas do lasu i tam nas gazowano i rozstrzeliwano i palili... Otóż prosimy, aby nasi przyszli bracia ukarali naszych morderców. Świadków naszego gnębienia, którzy mieszkają w tej okolicy jeszcze raz prosimy o rozgłoszenie tego morderstwa po całym świecie..."[17]
"Wzięto nas od starca do niemowlęcia między miastem Koło a Dąbie. Wzięto nas do lasu i tam nas gazowano i rozstrzeliwano i palili... Otóż prosimy, aby nasi przyszli bracia ukarali naszych morderców. Świadków naszego gnębienia, którzy mieszkają w tej okolicy jeszcze raz prosimy o rozgłoszenie tego morderstwa po całym świecie..."[17]
[1]
영묘에 적힌 문장에 대해선 아래 '전후, 재판' 장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2]
보통 역사에 등장하는 헤움노라 하는 지역은 이 수용소가 지어진 곳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정도 가야 나오는 역사적 지역으로
토룬 근방 일대를 말한다. 이 수용소가 위치한 마을 '헤움노'와는 다른 지역으로, 구분을 위해 헤움노 마을의 정식 명칭은 '헤움노 나드 네렘(네르 강의 헤움노)'이라 한다. 동유럽사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참고 바란다.
[3]
현 폴란드의 비엘코폴스카주 일대. 폴란드 총독부의 영역은 아니었기 때문에 헤움노 수용소는 라인하르트 계획에 따라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4]
제 3제국의 최상위 행정구역은 대관구(Gau)와 제국 대관구(Reichsgau)였는데, 대관구는 기존의 독일 영토에 세웠고 제국대관구는 새로 합병한 오스트리아, 주테텐란트, 독일제국 시절 독일 영토였던 비엘코폴스카 일대, 포메렐리아 일대(그단스크 주변)에 세웠다. 보헤미아, 모라바 지역은 보호령으로 남겼다.
[5]
영어로는 가스 밴. 트럭을 개조해 짐칸을 밀폐된 공간으로 만들고 이 공간으로 트럭의 배기가스가 흘러들어가도록 호스를 연결하고 트럭의 엔진을 공회전시켰다. 짐칸에 있던 유대인들은 약 20분 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6]
독일 점령지 전체에서 최대의 게토는 약 42만명이 수용된 바르샤바 게토였고 우치 게토는 약 22만명이 수용되어 두번째로 큰 게토였다. 하지만 바르샤바 게토는 폴란드 총독부 통치하에 있었다.
[7]
한편 총독부의 라인하르트 작전은 계속 진행중이었다. 헤움노는 라인하르트 작전과는 별개의 시설이었다.
[8]
바르테란트의 어원이다.
[9]
우리나라엔
치클론 B가 절멸수용소의 주된 학살방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론 엔진 공회전을 통한 일산화탄소 중독이 훨씬 더 많이 사용되었다. 나치의 주요절멸수용소 6곳 (+2곳)에서의 희생자 수는 약 320만명인데, 치클론 B는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에서만 사용되어 약 120만명 정도가 치클론 B에 의해 희생되었고 나머지 200만명은 대부분 일산화탄소 중독, 일부는 대규모 총살(주로 트로스테네츠에서)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10]
협로가 존재하긴 했지만 수용소로 연결되는 중간에 손상되어 있었다.
[11]
숲에서 일하는 존더코만도는 발트코만도(Waldkommando)라 불렀다
[12]
스위스의 차량 제작 회사. 사우러 사가 직접 가스 밴을 제작한 건 아니었고 사우러 사의 트럭을 독일의 Gaubschat Fahrzeugwerke사가 가스바겐으로 개조했다. 사우러 사의 제품 외에
르노,
오펠 사의 트럭이 가스바겐으로 개조되었고 이렇게 전쟁 중에 개조된 가스바겐의 수는 약 20여 대로 추정된다. 즉, 이 가스바겐들 상당수는 처음부터 유대인을 죽일 목적으로 만든 차량이 아니었단 뜻이다.
[13]
1943년 1월 SS통계국장 리하르트 코어헤어가 하인리히 힘러에게 보낸 보고서로 1939년부터 1942년 12월 31일까지 폴란드 총독부와 바르테란트 관구에서 학살된 유대인 수를 보고한 자료이다.
[14]
프랑스의 유대인 감독 클로드 란츠만(Claude Lanzmann)이 1985년 절멸수용소의 유대인 생존자들, 현지 폴란드인, 일부 살아남은 나치 간부, 홀로코스트 학자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모아 만든 9시간 30분짜리 다큐멘터리이다. 당시를 직접 기록한 시각자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증언과 인터뷰로만 구성되었으며, 생존자들이 당시의 상황을 더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도록 일부러 당시 그들이 하던 일들을 비슷하게 재연하게 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가장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중 하나지만, 감독이 '반 유대주의적인 폴란드'의 시각을 가지고서 홀로코스트 당시의 폴란드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구성을 해 큰 논란이 되었다. 홀로코스트와 폴란드인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골치 아픈 논쟁거리인데, 확실한 건 당시의 폴란드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긍정적이었는지 또는 부정적이었는지 어느 한 가지로 칼같이 단정해 일반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을 보고서 쇼아를 관람하고자 한다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볼 필요가 있다.
[15]
쇼아에서 그가 과거를 재연하며 나룻배에 타고서 부르는 노래 중 하나는 독일 제국 군가 '만일 병사들이(Wenn die Soldaten)'인데, SS가 그에게 가르치고 부르게 한 노래였을 것이다.
# 노래 자체는 매우 흥겹기 때문에 당시 상황은 더욱 아이러니했을 것이다.
[16]
5명 단위로 처형이 이루어졌는데, 희생자들은 배를 바닥에 깔고 엎드린 채로 운명을 기다렸다. 스레브닉은 5명 중 세번째였다고 한다.
[17]
영묘의 반대편에는 PAMIETAMY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우리는 기억한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