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화중(和重) / 춘정(春庭) |
본관 | 하양 허씨[1] |
출생 | 1908년 7월 6일 |
경상북도 하양군 마양면 부호동 (현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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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1년 4월 8일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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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허동상은 1908년 7월 6일 경상북도 하양군 마양면 부호동(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에서 아버지 허관(許𥟓, 1885 ~ 1910. 10. 6)과 어머니 문화 류씨(? ~ 1913. 3. 10)[3]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5촌 당숙 허훤(許禾+萱, 1870 ~ 1889. 7. 15)에 입양되었다.그는 18세 때부터 17촌 지간의 족숙(族叔) 허병률을 따라 군자금을 모금한 바 있으며, 1930년 1월 경산군 하양서당의 훈장으로 있으면서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자극을 받고 때마침 허병률의 권유에 대구부에서도 학생들과 총궐기하여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였다.
같은 달 14일과 15일 새벽에 그는 격문을 대구고등보통학교,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대구상업학교 등 대구부내 각급 공·사립학교 및 시내 각처의 담장에 부착하거나 따로 발송하기도 했으며, 동지 규합에도 힘썼다.
이 일로 인해 사흘 후인 18일, 그는 대구부 명치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서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 구류당했으며, 1930년 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였으나 그해 7월 9일 원심 판결이 그대로 적용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1년 4월 8일 별세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