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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케야마 카즈히로 畠山和洋 | Kazuhiro Hatakeya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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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82년 9월 13일 ([age(1982-09-13)]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이와테현 하나마키시 |
포지션 | 1루수, 3루수, 좌익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2000년 드래프트 5라운드 |
소속팀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4~2019) |
지도자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군 타격코치 (2022~2024.0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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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야구선수.2. 프로 이전
2.1.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해 4학년 때 현지 소년단팀에 가입했다.당시엔 야구뿐 아니라 농구 등 다른 스포츠도 즐겼다.진학한 하나마키시립 유구치중학교에는 농구부가 없었기 때문에 야구에 집중한다.탁월한 비거리 타격으로 활약했지만 폼은 아류였다.중학교 3학년 때 현 대회에서 우승했다.그 후, 친형이 에이스를 맡고 있어 1972년에 친아버지도 투수로 소속되어 선발 출장을 이루어 있는, 센슈 대학 키타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1년부터 주전 3루수로 자리 잡았고 타격폼 교정에 성공했다.1998년 제80회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여수관과의 1회전에서 무승부 재경기를 포함한 2경기에 5번 3루수로 선발출장, 총 7타수 6안타 3타점으로 활약하고 있으나 팀은 재경기에서 탈락했다.2000년의 제82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는 1회전에서 모리오카 료스케를 껴안는 묘토쿠 기쥬쿠와 대전해 패퇴.자신도 4타수 무안타였다.1년 후배에는 카지모토 유스케가 재적하고 있었다.당시는 2 학년의 카지모토가 에이스로 4번을 맡고 있어 하타케야마는 3번 3루로의 출장이었다.
2000년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로부터 5순위로 지명을 받아 계약.
참고로 최준석이 살이 좀 덜 찐 모습(…)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닮았다. 플레이 스타일도 비슷하고 나이와[1] 포지션도 동일. 심지어 커리어하이 시즌도 2015년, 은퇴 시즌도 2019년으로 동일하다!
3. 선수 경력
3.1.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절
2004년 8월에 알렉스 라미레스와 교체되어 1군에 첫 승격되었고, 8월 6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첫 출장, 10월 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다카하시 나오나리로부터 프로 첫 안타를 뽑아냈다.2005년 8월 19일에 후루타 아쓰야로 교체되어 승격해, 그 날의 한신 타이거스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대타 출장하자, 후지타 타이요로부터 프로 첫 홈런을 날렸다.
2006년은 2군에서 보내는 시기가 길어서 2군에서는 타율.313·7홈런·101안타로 최다 안타를 획득했고 외야수로서도 45경기에 출장했다.
2008년은 개막을 2군에서 맞이했지만 가와시마 게이조의 부상이나 아담 리구스의 부진으로 4월 8일에 승격되자 4월 15일의 대 요코하마전에서 홈런을 쳐냈고 5월 18일의 대 한신전에서는 에런 가이엘을 대신해 처음으로 4번·3루수로 출장해 시즌 종반까지 4번 타자로서 출장했다.최종 121경기에 출전해 자신의 최다인 9홈런·58타점을 기록했다.타율도 .279를 기록하며 프로 첫 규정타석에 도달했다.좋은 공을 기다려 오른쪽 방향으로 흘리는 안타가 많았고 볼넷 53개는 팀 최다(세시픽리그 7위)였지만 수비에선 3루수로서 6실책, 1루수로서 5실책을 내줬고 4번 타자임에도 경기 막판 대주나 수비 굳히기로 교체된 경우도 많았다.
2009년에 제이미 덴트나의 가입으로 개막 직후에는 주로 대타로 출전했고, 8월에는 덴트나와 미야모토 신야의 이탈로 인해 주전 출장의 기회가 돌아왔지만 타율 .236·4홈런·19타점, 득점권 타율은.172로 전년보다 성적이 떨어진다.
2010년에도 당초 대타 기용이 대부분이었지만 덴트나의 부진으로 6월 하순부터 주전 기용이 늘면서 93경기 출전하면서 자신의 최다인 14홈런을 기록했고 출루율 0.380에 장타율 0.551로 결과를 남겼다.
2011년에는 개막 주전으로 놓쳤지만 조시 화이트셀의 부상으로 4번 타자 겸 첫 주전으로 나선 경기에서 2홈런의 활약.그 후에는 4번으로서 1루수와 화이트 셀 출장시에는 좌익수로서 출장해, 올스타전에 팬 투표로 선출. 자신의 첫 선발이 되었다.7월 22일, 제1차전의 5회에 타케다 마사루로부터 역전 3점 홈런을 쳐 MVP를 획득했다[2].후반전은 막판 부진했지만 그래도 시즌 내내 팀의 4번 타자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며 리그 2위 23홈런, 리그 3위 85타점, 리그 1위 78볼넷을 기록했다.자신의 첫 1년간 등록 말소되지 않고 시즌을 보냈다.
2012년에는 개막부터 부진해 4번을 놓쳐 하위타선에서 기용되기도 했지만 올스타전에는 감독 추천으로 선출돼 2년 연속 출전한다.현지·이와테현영 야구장에서 첫 구연 개최가 된 7월 23일의 제3차전에서는 전세·4번으로 스타팅 출장.4회에 시오미 타카히로로부터 솔로 홈런을 날리는 등, 4타수 2 안타 1 타점을 기록해, 감투 선수상을 획득했다.
2013년, 5월 17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마쓰나가 야스히로로부터 구단 최초로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쳐냈다. 하지만 결국 타율은 2할 초반에서 오르지 못하고 8월 말에 2군으로 떨어졌고, 9월에는 도다 구장에서의 수비 연습 중 왼쪽 옆구리를 다쳐 전선을 이탈하게 되어 남은 시즌을 망쳤다. 그런데도 팀타선은 발렌틴을 뺀 나머지가 다 망한바람에 타격 성적으론 얼떨결에 상위권에 올랐다.
2014년 6월 8일 세이부전에서 주루 중에 왼발을 다쳐 도중에 교체,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좌대퇴 이두근육 이탈'로 전치 4주 진단을 받았고, 7월 29일 한신전에서 복귀해 복귀 후 첫 타석 첫 안타가 결승 적시타를 맞게 된다.그 해 시즌에는, 최종적으로는 홈런 17, 리그 7위가 되는 79타점, 규정타석에도 도달해, 자신의 최고가 되는 리그 8위의 타율.310을 마크(규정 3할은 첫)했다. 득점권 타율은 리그 2위의 .402를 기록했고, 최고의 승부력도 발휘했다.
2015년 4월 2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진구구장)에서 프로야구 사상 273번째 통산 100홈런을 달성했다.같은 해는 캐리어 하이의 26 홈런, 팀 일본인 최다 기록이 되는 타점 105를 기록해 타점왕의 타이틀을 획득.우승을 이룬 야쿠르트 타선을 견인했다.
2016년 4월 들어 등의 당김을 호소하여 일시 이탈, 6월에 좌유구골 좌상이라는 진단을 받았으며, 이전부터 손상되었던 우 아킬레스건 상태의 악화도 있어, 이탈한 채로 시즌을 마친다. 자신의 공백으로 팀은 5위로 시즌을 마치며 폭망.
2017년에도 4월 중순 왼쪽 종아리 부상으로 이탈한 이후 15경기 만에 시즌을 마치게 돼 "나의 쇠약함을 포함해 속상하다"고 했다. 팀또한 최하위로 추락.
2018년은 개막을 일군에서 맞이한다.한 번 등록 말소되는데도 5월부터 시즌 종료까지는 1군에 대동했지만 사카구치 도모타카가 1루 주전으로 정착하면서 주전 출전이 뜸해 대타로 나설 차례가 늘었다.75경기 출전에 타율 0.248, 5홈런, 27타점. 오프에는 감액 제한을 넘는 7000만엔 감소의 4000만엔으로 계약.
2019년은 9월의 시점에서 1군의 출장이 없고,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결단. 은퇴 시합은 타테야마 쇼헤이와 함께 9월 21일의 본거지 진구구장에서의 주니치전이 되어, 6회말에 블라디미르 발렌틴의 대타로 출장, 야나기 유야로부터 우전 안타를 쳐 대주자 나카야마 쇼타가 보내져 벤치로 물러나 현역 생활을 끝냈다.12월 2일에 자유계약 공시되었다.
4. 지도자 경력
2022년 시즌부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2군 타격코치를 맡게 됐다. 2024년 6월 27일을 끝으로 퇴단했다.5. 관련 문서
[1]
사실 최준석이 빠른 83이라 한살 어리지만 학교 입학이 동기라서 사실상 동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