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명군이 되어보세! 2부의 등장인물.원 역사의 선조로, 성종의 11남(적4자)[1] 진성대군의 서자 덕흥군의 아들이다.
왕위 계승이 무종(연산군)-인종(아들)-명종(아들)으로 바뀌어 명종이 외아들을 잃고 사망하자 양자를 고를 때 하성군은 6촌 형제로 항렬이 같아 즉위하지 못했고, 대신 본작 가공인물인 경성군[2]이 명종의 양자가 되어 즉위하면서 성종의 증손자 중 한 명으로 남게 되었다. 설정상 경성군의 5촌 당숙이지만 경성군이 하성군보다 1살 연상이다.[3]
2. 작중 행적
실제 역사에선 왕이 되었지만 재석이 1부에서 역사를 바꾸는 바람에 종친으로 놀고먹고 지내고 있으며, 주색잡기로 악명이 자자하지만 아랫사람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해서 노비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이가 비슷하던 경성군과 형제처럼 함께 자라 경성군의 비호를 받아서 주색잡기를 비롯한 각종 사건 사고를 벌이고 있었고, 그 아들인 임해군도 어린 나이에 패악질이 대단해서 아무도 임해군과 혼인하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였다.그러다 1582년 주인공 재석이 경성군에게 빙의하면서 태도가 냉담해졌고, 이에 위험해진 걸 깨닫고 처신을 조심했다. 그 임해군도 위험을 직감하고 내수사에 안 끌려갈 수준으로 사고의 스케일을 줄였을 정도. 그러다[4]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인 차차가 조선 왕족과 혼인하고 싶다며 찾아왔고 십여 명의 왕족들이 청혼하는 상황에서 왕세자빈의 책봉식 때 임해군이 차차와 눈이 맞아 혼담이 오갔다는 말을 듣자 잽싸게 재석에게 찾아가서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해 재석의 어이를 날려버렸다.
그런데 임해군이 차차의 함정에 넘어가 차차를 강간하려다 시녀 유키를 대신 강간했고 현장에 체포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부하를 시켜 방화까지 벌인 탓에 강간죄 및 방화죄로 처벌받게 되었다. 이 건은 차차가 손을 써서 곤장 30대 맞고 차차와 유키를 처첩으로 거둔 뒤 다시 사고 치면 그때는 바로 이혼하고 남은 형량을 집행하는 것으로 정리되었지만, 재석을 만나러 왔다 바로 구속당했던 하성군은 사건 이후 재석에게 불려갔다.
하성군은 재석에게 용서를 빌며 재석에게서 전 재산과 작호를 잃을 각오를 했지만 재석은 하성군이 가진 전답의 3분의 2를 받아가고 차차와 교환할 겸 하성군을 일본으로 보내서 화이트 요원 노릇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족들을 모두 남기고 시종들만 데리고 일본 가라는 명령에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아 달라 빌었지만, 능력은 좋아도 특유의 찌질한 인성 때문에 하성군을 싫어하던 재석은 짜증이 폭발해서 가차 없이 보내버렸다. 이후 일본에 머물며 일본의 정세를 조선에 전하는 화이트 요원 노릇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는데, 인성과 별개로 유능하고 귀족적 교양에 능숙한 데다 교활한 처세술도 가지고 있어 제 임무를 잘 수행했다.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에 오래 있으면서 일본을 천하라고 칭하는 이들을 많이 만나면서 그 생각이 조금은 옅어져서 조선과 일본이 각자 모습대로 잘 지냈으면 한다는 생각도 품는다.[5] 승려나 공경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고, 노부나가의 야망을 짐작하고 중원의 광대함을 노부나가에게 수시로 얘기해서 일본을 중화 세계에 편입시키려고 노력하는 등 자신의 자리에서 종친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재석의 신뢰도 일부 회복하고 귀국 후에는 일본의 침공 음모를 알리기 위한 성절사로 중국에 가기도 하지만...
임해군이 순왜가 되며 칭왕을 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궁으로 달려와서 이마가 깨지도록 머리를 찧으며 무고함을 호소했고 재석도 그의 노력을 알았지만 사안이 너무나 큰지라 재산도 모두 잃고 역적 집안이라는 꼬리표를 얻으며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임해군이 능지형으로 처형된 뒤에는 서자 둘과 함께 연해주로 전가사변 당했으며, 서자들과 부인들은 모두 고된 강제 노역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해버렸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광해군은 성직자가 되었기에 하성군의 후손은 멸족, 즉 원 역사의 인조 이후의 왕 전체가 소멸했다. 다만 하성군의 큰형인 하원군이 후손이 있었기 때문에 덕흥군파까지 단절되지는 않았다.[6]
이 세계관에서도 일본에서 스파이 노릇을 해 전쟁대비를 잘할 수 있게 한 인물 vs 아들 교육, 노비 관리를 똑바로 못해 초반 전쟁 피해를 키운 인물이냐로 호불호 갈리는 평가를 받을 듯하다. 자세한 묘사가 없어서 그렇지 원 역사에서는 인성의 문제와 별개로 능력만 따지면 조선 시대 모든 왕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났음을 고려하면 여기서도 능력만큼은 출중했던 듯하다. 재석도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성격을 싫어한 거지 하성군의 각종 교양과 머리 회전이 빠른 점은 높이 평가했다. 원 역사에서나 본작에서나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표본이었던 인물이다.
3. 기타
여러모로 본작 최대의 피해자 중 한 명으로, 장남 하나 잘못 둬서 자신과 일가족 모두 멸족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원 역사에서도 선조는 아들들의 비행을 최대 리스크로 달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방계 종친이라는 입지로 인해 최악의 결과를 불렀다.[7] 본작의 하성군은 나름 눈치 보면서 처신했고[8] 임해군도 매국노 짓을 하기 전까지 패악질을 하기는 했어도 강간과 방화사건을 제외하면 원 역사에 한참 미치지 못했음을 고려하면 하성군의 입장에서는 나름 억울하다고 할 수 있다.[9]하성군가가 멸족당하며 원 역사 인조 이후의 인물들이 모두 태어나지 않는 전개는 3부 이후부터는 원 역사에 없는 오리지널 황족들로만 서사가 흘러가기 때문에, 하성군 일가의 멸족은 본작이 가공인물 중심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복선이기도 하다.
차차 사건 전까지 임해군의 비행을 감싸긴 했지만 임해군이 답이 없다는 건 다들 알아서 차차 사건 이전부터 하성군의 실질적인 후계자 노릇은 광해군이었다고 한다.
정실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기 때문인지 지체 높은 집안 출신의 첩을 데리고 있는데, 임해군과 광해군의 어머니 김씨는 할머니가 계양군(세종의 아들)의 외증손녀, 어머니가 경안공주(태종의 딸)의 6대손으로 원 역사에서 간택후궁으로 추정되고, 첩 정씨 또한 본작에서도 정철의 누나 정씨가 본작 인종(무종의 아들이자 본작 명종의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간택후궁이었다.[10] 1부에서 재석이 종친들의 땅 문제 때문에 5대손이 되면 왕실에서 내린 전답을 모두 회수하는 것으로 법이 바뀌어 방계 왕족들은 가능한 한 최대한 치부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이 과정에서 처가에 대한 의존도도 높아졌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 때문에 원 역사와 같은 명문가 여식과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김씨와 정씨 모두 명문가 출신임을 고려하면 이들을 첩으로 맞은 것은 원 역사처럼 정실부인 박씨가 자식을 가지지 못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임해군과 광해군이 하성군의 적자급 대우를 받는 듯한 묘사가 있다.[11]
200화에서 하성군의 아들은 김씨( 공빈 김씨)의 아들인 임해군과 광해군이고 그 외에 아들 둘이 더 있으며 정원군과 순화군은 삭제되었다고 한다.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실인 박씨( 의인왕후 박씨)가 자식이 없어서 모두 서자라고. 원 역사 인빈 김씨 소생인 의안군(1577), 신성군(1578), 정원군(1580), 순빈 김씨 소생의 순화군(1580)이 하성군의 일본 추방 전에 태어났음을 고려하면 군호가 아니라 '수'를 받았다는 두 서자는 본작의 오리지널 인물들로 추정된다.[12]
일본에 지내던 당시에는 경성군이 갑자기 돌변해서 전쟁을 너무 자주 벌여 백성들의 삶이 고단해지고[13] 안 죽어도 될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무릇 왕이라면 치세에 집중해야 되지 않냐고 생각하기도 했다. 인성 문제와 별개로 평화로운 시대에는 명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안정적으로 치세를 굴리는 인물이었고, 재석의 패권주의적 행동으로 인해 명나라와 불필요한 외교 갈등을 빚어서 문제의 소지가 되는 걸 우려한 것이기도 했다. 해당 생각을 했을 당시에는 만력제 파업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이라, 반세기밖에 안 되어 명나라가 내부 모순으로 자멸하고 그 틈을 타 여진족이 중원의 패자가 되리라고 예상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미래를 모르던 당시 하성군의 입장에서는 전쟁 대비는 그렇다 쳐도 잦은 전쟁에 반대하는 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1]
폐비 윤씨가 낳은 요절한 장자와 3자가 있었다.
연산군은 엄밀히는 차자다.
[2]
진성대군과 정실 신씨의 아들 창녕군의 아들 은성대원군의 아들.
[3]
원 역사의 덕흥군이 중종이 42살일 때에 태어났음을 고려하면 정실인 신씨가 낳은 창녕군과 덕흥군의 나이가 부자뻘로 벌어져서 일어난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4]
사건 당시 재석이 차차를 '열여섯 살 소녀'라 평한 것을 보아 1583~1584년에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 차차는 1567년생이기 때문.
[5]
원 역사의 선조가 동시대 다른 사대부보다 편견이 덜한 편이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성격임을 고려하면 특이하지는 않다.
[6]
작은형
하릉군은 서자 둘밖에 없어서 하성군의 3남 영제군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7]
특히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이 심했는데 순화군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라서 나중에는 그 선조도 완전히 버렸다.
[8]
경성군의 태도가 달라지자마자 숙였으며, 그 이전에도 주색잡기가 심했지 구속이나 처벌을 받지는 않는 수준의 비행이었다. 왕족이 많았던 조선 전기에는 적당히 비행을 저지르는 게 오히려 역모에 안 말려들고 무사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이해 안 가는 처신도 아니다. 물론 임해군이나 순화군 수준이면 얄짤없지만.
[9]
임해군은 1572년생이라 재석이 빙의한 1582년 당시 10살밖에 안 되었고, 차차 건으로 사고쳤을 당시에도 잘 쳐봐야 만11~12세밖에 안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어린 나이에 사고를 너무 쳐서 혼사가 막혀 차차와 혼인시켜 달라고 하성군이 재석에게 요청하게 만들었지만.
[10]
사족으로 원 역사와 달리 하성군 가문이 멸족될 때까지 임해군, 광해군의 어머니가 살아있었다.
[11]
여기서는
공빈 김씨가 살아남아 총애가 원 역사
인빈 김씨에게로 넘어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2]
이순신의 3남 이면을 경성군의 서녀와 혼인시키겠다고 생각할 당시 '원 역사 신성군'을 떠올리는 장면도 있다.
[13]
재석의 시점에서는 안 나오지만, 실제로 잦은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졌던 건 사실이라고 한다. 세금이 오르거나 과부와 고아가 양산되어 이들의 처지가 어려워지거나 재석이 벌인 강제 이주로 인해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등. 예나 지금이나 강제 이주는 정부에서의 필요성과 별개로 당사자들 입장에게는 매우 고되서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일이라는 걸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