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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하칠룡(河七龍) |
본관 | 진주 하씨[1] |
출생 | 1898년 11월 6일 |
경상남도
칠원군 서면 구포리 (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구포리 평계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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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1년 2월 20일 |
경상남도 함안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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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하상운은 1898년 11월 6일 경상남도 칠원군 서면 구포리(현 함안군 칠서면 구포리 평계마을)에서 태어났다.그는 조한휘(趙漢輝), 안지호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 계획에 동참했고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윽고 3월 19일 정오경, 하상운을 비롯한 주도자들은 봉성동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오후 2시, 하상운과 3천여 명의 시위대는 주재소로 행진했다. 이때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자, 격노한 시위대는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했다. 이후 하상운은 군중과 함께 군청으로 들어가 함안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했다. 군중은 뒤이어 등기소, 우체국, 일본인 소학교로 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했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3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함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1년 2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하상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3년 11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