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24 20:41:29

필리프 조제프 드 로스탕



1. 개요2. 일생

1. 개요

Philippe Joseph de Rostaing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포병 장교. 7년 전쟁 시기에 진가를 발휘한 '로스탕 대포'의 발명자다.

2. 일생

로스탕은 1719년 10월 9일 모뵈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살 때 메츠의 포병학교에 입학했고 1732년 포병 장교가 되었다. 이후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했고 1737년에 포병대 특별 위원으로 승진했으며, 1741년 인도에 파견되어 포병대를 조직하고 포병학교를 설립했으며 폭탄에 쓰이는 분말 제조를 수행했다. 이후 그는 모리셔스에서 근무하면서 초석 정제 공장과 분말 공장을 설립했다. 1744년, 로스탕은 정규 위원이 되었고 부르도네 해군 제독의 지휘 아래 육상과 해군 포병 지휘를 맡아 마드라스 포위전 때 포병대를 지휘하여 프랑스군이 마드라스를 공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745년, 로스탕은 성 루이 기사단에 배속되었고 1749년 모리셔스로 돌아와 영국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방어 태세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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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복원된 로스탕 대포.

1755년 프랑스로 돌아간 로스탕은 1758년 신무기를 개발했다. 이른바 '로스탕 대포'로 명명된 이 대포는 1파운더 경포로, 잘 포장된 도로가 아닌 오솔길, 산책로 등에서도 이동이 가능했고 동물이 아닌 사람이 끌고 갔다. 이 대포에 동원될 인원은 총통을 운발할 5명, 바퀴를 운반할 2명, 받침대를 운명할 2명, 축에 한 명이었다. 또한 이 대포는 낮은 반동력을 가졌고 당시 프랑스에서 동시에 시험발사했던 스웨덴식 4파운더 대포와 비슷한 사격 속도와 사거리를 확보했다. 또한 비교적 가볍고 조립과 분리가 용이해 병사들이 쉽게 익힐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로스탕 대포는 22발에 달하는 대포를 빠르게 쏠 수 있었다고 한다.

로스탕 대포는 곧 프랑스군에게 유용하게 쓰였다. 1759년 독일 서부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로스탕 대포 22문을 사용했다. 또한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는 로스탕 대포에 긍정적인 평가를 남겼다.
각자의 부품들이 작은 말에 의해 운반되고 두 마리의 말에 달리 작고 가벼운 탄약차를 처분할 수 있다면, 이 대포는 경기병대에 아주 적합하다고 믿는다. 이런 조건이라면 독일의 어떤 길이라도 이들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로스탕 대포는 주로 경기병대에 이용되었고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에게도 지급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와 나폴레옹 전쟁시기에도 산악 지대(주로 알프스 산맥)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군대에게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 대포는 1802년 나폴레옹이 포병대를 개혁한 이후에 자취를 감췄지만 이후에도 예비 대포로서 수년간 수명을 유지했다. 로스탕은 이 대포를 제작한 공로로 1180 리브르의 상금을 수여받았다.

1759년, 로스탕은 중령의 직위를 획득했고 1765년 10월 15일에 포병대 대령으로 승진했으며, 1769년 1월 22일에 국왕군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후 1774년엔 그레노블 포병학교의 소장이 되었고 1779년엔 포병대 감찰대장으로 승진했으며, 1780년 3월 1일엔 소장이 되었고 1791년 5월 20일엔 중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발발 후 그의 입지는 위태로워졌고, 결국 1793년 긴급 체포되어 파리 혁명재판소로 끌려가던 중 병에 걸려 사망했다. 향년 7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