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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동방 로마군 기병대 지휘관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 Fulvius Macrianus |
|
출생 | 미상 |
사망 | 261년 |
반란 대상 | 갈리에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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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반란자. 갈리에누스 황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2. 생애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동방 로마군 기병대 지휘관으로, 귀족 출신의 아내(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유니아(Junia)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와 결혼하여 두 아들 티투스 플라비우스 유니우스 마크리아누스( 소 마크리아누스)와 티투스 풀비우스 유니우스 퀴에투스( 퀴에투스)를 낳았다. 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휘하에서 이집트 방면 로마군의 군인으로 복무했는데, 거기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이끌었다고 한다.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와 함께 사산 왕조의 왕중왕 샤푸르 1세와 맞섰으나, 에데사 전투에서 패배하고 황제는 포로 신세가 되었다.소 마크리아누스의 주화.
퀴에투스의 주화.
마크리아누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재정관리인 칼리스투스와 팔미라 기병 지휘관 오다에나투스와 함께 실리시아, 카파도키아 등 36개 도시를 급습한 샤푸르 1세에 맞서 싸워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에 그의 명성은 급상승했고, 동방 방면 로마군은 그에게 황제가 되어달라고 청했다. 마크리아누스 본인은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두 아들 소 마크리아누스와 퀴에투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 두 사람의 이름으로 금화와 은화가 주조되었는데, 당시 마크리아누스 일가의 영향력이 상당했는지 훗날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동전의 양이 상당했다. 실제로 로마 제국의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지에서 마크리아누스 일가를 황제로 인정했다.
마크리아누스는 제국 서방의 황제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에 맞서기 위해 장남과 함께 서쪽으로 진군했고, 퀴에투스와 칼리스투스는 동방에 머물렀다. 261년 가을, 마크리아누스와 소 마크리아누스는 일리리쿰에서 갈리에누스가 급파한 기병대 지휘관 아우레올루스와 격돌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고, 그는 장남과 함께 적병에게 목숨을 잃었다.
얼마 후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갈리에누스는 더 이상 동방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반란에 가담했던 오데나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dux Romanorum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오데나투스는 갈리에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여전히 그에게 적대하는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마크리아누스의 차남 퀴에투스는 칼리스투스와 함께 에메사로 도주했으나, 에메사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