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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윌리엄 풀브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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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아칸소 주 클래스 3)
제72-78대
해티 캐러웨이
제79-93대
J. 윌리엄 풀브라이트
제94-105대
데일 범퍼스

미합중국 제79-93대 연방 상원의원
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
James William Fulbright
파일:J._William_Fulbright_in_1960_(cropped).jpg
<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1905년 4월 9일
미국 미주리 섬너
사망 1995년 2월 9일 (향년 89세)
미국 워싱턴 D.C.
부모 아버지 제이 풀브라이트
어머니 로버타 풀브라이트
배우자 엘리자베스 윌리엄스 (1932년 결혼, 1953년 이혼)
해리엇 풀브라이트 (1953년 결혼)
학력 아칸소 대학교 ( 역사학 / B.A.)
옥스퍼드 대학교 팸브룩 칼리지 (졸업)
조지 워싱턴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 법학 / LL.B.)
의원 선수 1 (하원)
5 (상원)
의원 대수 78 (하원)
79,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지역구 아칸소 제3구 (하원)
아칸소 클래스 3 (상원)
소속 정당

약력 아칸소 대학교 총장 (1939~1941)
연방 하원의원 (1943~1945 / 아칸소 3구)
연방 상원의원 (1945~1974 / 아칸소 클래스 3)
상원 금융 및 통화위원장 (1955~1959)
상원 외교위원장 (1959~1974)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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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아칸소주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했다.

민권법과 인종평등에 일부 반대했지만 동시에 196~70년대 베트남 전쟁에 강력하게 반발해 조지 맥거번, 테드 케네디 등 북부의 민주당 진보파와 협력하는 복합한 정치적 행보를 보인 인물로,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명이다. 또한 풀브라이트 장학금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든 것으로 매우 잘 알려져있기도 하다.

2. 생애

1905년 출생. 부모는 지역에서 언론사를 했고 집안이 유복해서 부족함 없이 자랐으며, 아칸소 대학교 역사학을 전공한 후 로즈 장학금을 받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팸브룩 칼리지에 진학했다. 귀국해서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해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잠깐 미국 국무부 소속 변호사로도 일했다.

1936년 낙향해 아칸소 대학교에서 법학 교수직을 지냈는데, 교수직 평가가 좋았고 부모 빽도 있어서 1939년 불과 34세의 나이로 아칸소 대학교 총장의 자리에 올랐다. 총장으로서 평가는 무난했지만, 1941년 돌연 아칸소 주정부에 의해 총장 직에서 해임되는데, 그 이유는 풀브라이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지역 신문사가 현역 주지사의 재선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격분한 풀브라이트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길로 1942년 중간선거에서 아칸소 3구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1]

1944년, 초선 하원의원으로 바로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경쟁자는 미국 최초의 여성 선출직 상원의원이었던 해티 캐러웨이였는데 캐러웨이가 적극적으로 유세를 벌이지 않았기에 풀브라이트는 바로 경선에서 승리하고 본선에서는 8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된다. 초선 상원의원 시절인 1946년, 추후 풀브라이트 장학금이라 불리게 될 장학금 프로그램 창설을 주도하였다.

1950년 조지프 매카시 매카시즘이라 불리는 멸공주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풀브라이트 장학금이 잠재적 공산주의자를 키운다는 비난을 하자, 풀브라이트는 린든 B. 존슨 원내대표의 조언을 무시하고 매카시즘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비록 매카시에게 "Halfbright"라고 불리는 수모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 풀브라이트는 매카시즘에 싸운 용감한 소장파 의원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으며 이름이 알려진다. 그러나 동시에 풀브라이트는 1957년 민권법에 반대하고 흑백 통합에 반대하는 서한에 서명하며[2] 유세 도중에 적극적으로 인종주의를 이용하는 등 다른 사회 문제에 있어 보수적인 식견을 드러냈다.

1959년, 풀브라이트는 시어도어 F. 그린의 뒤를 이어 상원 외교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외교위원장으로서 풀브라이트는 국무장관에 못지 않은 강력한 외교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주요 지지자 중 하나였고, 케네디의 가장 주된 상원 동맹자 중 하나였다. 케네디와 존슨은 그를 국무장관으로 추천했지만 당내 민권 운동 세력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그러나 국무장관 임명이 불발되면서 풀브라이트의 외교 성향은 점점 더 좌측으로 이동했다. 풀브라이트는 피그스만 침공과 베트남 전쟁의 가장 확고한 초기 반대자였으며, 동독이 베를린을 봉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 서독으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1962년 쿠바 핵위기가 일어나자 풀브라이트는 가장 열렬한 평화주의자가 되어있었다. 그는 소련과의 협력을 지지하였으며 봉쇄로는 공산주의에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원내 반전좌파 세력을 이끌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이 터지자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그를 상대로 "Johnson treament"를 시전한다. 존슨은 풀브라이트가 통킹만 결의안에 찬성한다면 베트남 전쟁에 매우 반대하여 통킹만 결의안 통과를 망설이고 있던 다른 반전좌파 의원들[3]도 통킹만 결의안에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존슨은 남부 민주당원으로서의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꼭 찬성투표해달라고 애원했고, 측근을 통해 만약 그가 결의안에 찬성하면 상원 외교위원회에서의 더욱 큰 권력은 물론 국무장관직도 줄 수 있다는 정보를 슬쩍 흘려 그를 갖가지 방법으로 구슬렸다. 풀브라이트 역시 보수강경파 대선후보 배리 골드워터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북베트남에 대한 강경한 "경고"라고 생각했고, 반전좌파 의원들을 불러모아 결의안은 그저 경고일 뿐 오히려 경고를 함으로써 북베트남이 한발 물러서면 전쟁의 확률이 더 낮아질거라고 설득했다. 이에 조지 맥거번을 비롯한 많은 의원들이 고민 끝에 결의안에 찬성했고, 결과적으로 웨인 모스와 어니스트 그루잉 두명만이 결의안에 반대투표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풀브라이트는 자신의 결정이 실수임을 알게 되었으며[4] 프랑스 언론인과의 대화, 현지 방문 등을 통해 점점 베트남 전쟁과 존슨 행정부에 회의감을 갖게 되었고, 1966년에는 외교위원장의 직권으로 존슨 대통령을 상원에 출석시켜 베트남 전쟁 청문회를 여는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존슨 대통령이 거부하며 불발되긴 했으나 풀브라이트는 1966년부터 열정적으로 베트남 전쟁 청문회를 주도했으며 이는 방송으로 생중계되어 전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을 부채질했다. 린든 B. 존슨은 상원에서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인 풀브라이트가 배신을 했다고 생각했고 그를 이스카리옷 유다라고 부르기까지 했다.[5]

구정공세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풀브라이트는 더욱 가열차게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벌였고, 존 C. 스테니스가 이끄는 베트남 전쟁 매파 세력과는 크게 갈등했다. 닉슨 행정부에 들어서도 풀브라이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고 1971년 4월 22일 젊은 참전용사 존 케리를 청문회에 부르는 것으로 자신의 반전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 이 청문회에서 존 케리는 미국 정부가 자존심만을 위해 무의미하게 미국 청년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비난하며 청문회 출석 직후 링컨 기념관 앞에서 전공 훈장을 내던지는 퍼포먼스를 벌였다.[6]

그러나 이러한 풀브라이트의 입장은 아칸소 주민들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것이었으며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 전쟁 등 거의 모든 문제에서 닉슨을 압박한 풀브라이트의 행보는 아칸소 주민들이 그를 "자유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7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풀브라이트는 민주당 내 경선에서 데일 범퍼스에게 크게 밀리고 만다. 실망한 풀브라이트는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한 풀브라이트는 전쟁에 반대하는 여러 책을 남겼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관리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95년 사망했다.

3. 여담

  •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1964년, 1960년, 1957년 민권법에 반대하였고 1965년 투표권법에도 반대하였다. 1964년에는 로버트 버드, 스트롬 서먼드 등 다른 남부의 보수 상원의원들과 함께 필리버스터에 동참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아칸소 대학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 대한 철거 여론이 불었다. 하지만 그의 전기작가는 "풀브라이트가 인종주의적 표결에 동참한 것은 맞지만 신념적 인종주의를 견지했다고 보기 힘들다"라는 입장을 내면서 동상 철거 여론이 힘을 잃었다. 실제로 그는 군대 흑백 통합을 지지하는 등, 다른 인종주의자들과는 다른 온건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인종관이 어떠했는지는 종종 첨예한 논쟁 거리가 된다.

[1] 유명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이 영국 정보부 소속으로 풀브라이트의 초선 하원의원 시절을 평가한 적이 있다. 여기서 벌린은 풀브라이트를 "다재다능한 젊은 국제주의자로 미국의 추후 정세 변화를 상징할 인물이 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2] 이 서한에 서명하지 않은 남부 민주당원은 단 세명, 에스테스 키포버, 앨버트 고어 시니어, 린든 B. 존슨이었다. [3]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 앨런 J. 엘린더, 게일로드 넬슨, 대니얼 브루스터, 공화당의 존 셔면 쿠퍼, 제이콥 재비츠 등 6명이었다. [4] 애초에부터 통킹만 결의에 반대했던 웨인 모스는 "참 빨리도 알아챈다"라며 비꼬았다. [5] 조지 맥거번이나 웨인 모스, 게일로드 넬슨 같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반대했기 때문에 존슨의 관심 범위 밖에 있었으나, 외교위원장 풀브라이트의 태세 전환은 존슨에게 정신적,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6] 존 케리의 성명은 1968년 혁명의 마지막 불길을 타오르게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케리의 폭로가 있은지 불과 일주일 후인 1971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아 워싱턴에 집결한 수만명의 학생들이 베트남 전쟁 종식을 요구하는 행진을 벌였고, 리처드 클라인딘스트 법무차관은 이들을 모두 체포해 야구경기장에 일시 구금시켰다. 하지만 이 체포 과정에서 단 한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으면서 집회는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이후에도 1970년대 중반까지 산발적인 반전 좌파 집회가 있긴 했으나, 1971년 메이데이 행진 이후 미국 반전좌파는 점차 힘을 잃었고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들이 지지한 조지 맥거번이 대참패하며 68혁명의 여파는 사그라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