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 카바조스 / Fort Cavazos | |
Fort Cavazos
1. 개요
미국 텍사스주 킬린에 위치한 미 육군부대. 웨이코의 남서쪽, 주도 오스틴에서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국내에 건립된 미 육군부대들 중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부대명은 남북 전쟁 당시 아메리카 연합국 텍사스 여단 지휘관이었다가 승진하여 테네시군 사령관까지 맡았던 존 벨 후드(John Bell Hood) 장군의 이름이다. 2010년대 이후 남군 장군들의 이름을 딴 기지 이름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 내에서 자주 나오는데[1] 포트 후드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만큼 대표적인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 결국 포트 후드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각각 수훈십자훈장을 받은 리처드 E. 카바조스(Richard Edward Cavazos) 대장[2]의 성을 따서 포트 카바조스로 명칭을 바꾸기로 확정되었다. 2023년 5월 9일에 명칭이 변경되었다.2. 기지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하면서 독일기갑부대 소속 전차들과의 대결을 위해 대전차 차량훈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공터부지가 풍부한 텍사스 주가 선정되고, 후일 제3대 휴스턴 대학교 총장이던 앤드루 데이비스 브루스(Andrew Davis Bruce) 준장[3]이 '대전차 차량 전술및 화력 센터'를 조직하고 킬린을 부지로 선정한다. 미 육군부는 1942년 1월 15일 부지선정 결과를 발표하고 10만 8천 에이커(437 제곱 킬로미터)의 부지를 처음으로 매입한다. 관련시설 건립비용으로는 2천 2백 80만 달러의 견적이 산출되었다. 건설은 이렇게 시작되어 7개월 후인 1942년 8월 15일 완공을 목표로 하였다. 해당 부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이주를 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으니, 이주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부대관련 부지 얼마를 삯을 받고 방목지로 대여하는 방안이 나오게 되며 이것은 현재도 발효 중이다.건설을 순조롭게 마치고 신설된 부대시설로 군인과 군 관련부서들이 들어선 후 1942년 9월 18일 정식 개관식을 가졌다. 처음에는 3만 8천여명의 병사들의 훈련 및 거주지를 확보하였으며, 1943년 1월 벨 카운티 소재의 부지 1만 6천 에이커(65 제곱 킬로미터)와 게이츠빌 근처에 위치한 코르옐 카운티 소재의 3만 4천 943에이커(141 제곱 킬로미터)의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였다. 이 코르옐 카운티 부지는 전시 중 4만명의 병력의 거주지및 4천명의 전쟁포로를 수용하는 미 군사 징계병영으로 이용되었다. 1942년 말에는 4만 5천명의 병력이 거주 및 훈련을 하게 되었고, 1943년말 부대의 총 인원은 9만 5천에 육박하게 된다.
이 인원은 1944년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1944년부터 대탱크 차량대대 소속 부대원들이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1944년 3월 야전포병대대들과 보병교환훈련센터로 신속히 전환된다. 그러던 것이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들어와서는 캠프 후드를 존속하면서도 감소하는 인원에 맞추기 위한 변화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종전이 되면서는 부대의 훈련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어 주요 업무는 군수품 회수와 동원해제 등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1945년 9월 제대센터가 건립되고 부대부속 영창에 수용된 전쟁포로의 수가 1천 807명으로, 부대주둔 병력의 1만 1천명으로 감소된다.
1954년에는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했던 3군단이 이전해 왔다. 부대 소속 전투부대와 제4군의 훈련 감수 업무를 1954년부터 3군단이 해체되던 1959년 까지 담당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제4기갑사단이 재소집되면서 독일로 파병되었다. 이후 1951년 포트 후드는 다시 3군단 본부가 되었으며, 1962년 2월 3군단은 미 육군 전략군단으로 지정되었다. 1963년 6월 15일에는 미 육군이 킬린기지를 회수하였다. 1969년 10월 서부 포트 후드와 비행장을 로버트 그레이 비행장으로 개칭하였는데, 본 지역 출신으로 1942년 둘리틀 특공대에 참여하고 전쟁 중 전사한 군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71년에는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제1기병사단이 돌아오면서 제1기갑사단이 독일에 주둔하던 제4기갑사단의 순환부대로써 독일에 파병된다.
현재 서울시 면적보다 약간 더 큰 158,706 에이커(64,226 헥타르)의 부지에 6천 7명의 장교들과 8만2천 610명의 사병들을 위한 숙소를 보유하였다. 2010년 센서스 기준으로 미국내 군부대 주둔 최다인원을 기록한 기지로서, 2014년 4월 기준으로 주둔 병력 4만 5천 414명과 관련 민간인 군무원 8천 9백명이 근무 중이다. 부지는 총 21만 4천 에이커(8만 7천 헥타르)에 이른다.
3. 소속부대
- 제3기갑군단(III Armored Corps) Phantom Corps
- 제1기병사단
- 제36 공병여단
- 제13 전투지속유지 사령부
- 제3 기병연대[4] [5]
- 제41 화력여단 [6]
- 제504 전투지역 감시여단
- 제89 헌병여단
- 제85 민사작전 여단
- 제1 의료여단
- 작전시험 사령부
- 제13 재정관리센터
- 제403 육군 야전지원 여단
- 제48 화학전 여단
- 제69 방공포병여단
- 제57, 제62 원정통신여단
4. 사건 사고
4.1. 바네사 기옌 살해 사건
자세한 내용은 바네사 기옌 살해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5. 여담
-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 곳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엄청난 수의 편지를 받는 것 외엔 일반사병과 마찬가지로 대우를 받았으며 1958년 10월, 독일로 파병되었었다.
- 전 팔레스타인계 미 육군 일병 나세르 제이슨 아브도는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피하기 위해 탈영 후 이곳 인근의 군인들이 많이 모일 레스토랑을 압력솥 폭탄으로 테러하려 했으나 저지되었고,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
2009년 11월 5일 총 13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을 당한 총기 난사 사건(2009 Fort Hood shooting)이 일어난
흑역사를 기록한 부대이기도 하다. 정신과
군의관이자 미 육군 소령이었던 니달 말릭 하산(Nidal Malik Hasan) 소령이 범인으로, 그는 2013년 8월 23일 유죄가 선고되고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범행 전부터
FN Five-seveN과 여분의 탄창 및 탄약을 구입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했었다.
- 2014년 4월 2일 또 다시 총기 난사 사건(2014 Fort Hood shooting)이 발생했다. 범인은 당시 34살의 미 육군 상병(Specialist/SPC)인 이반 로페즈(Ivan A. Lopez-Lopez)로 .45ACP를 사용하는 S&W M&P 권총을 사용했다. 이 사건으로 범인을 포함하여 총 4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 텍사스의 주도인 오스틴과 근접한 곳에 위치한 까닭에 일반 사병들이 주말 외박으로 오스틴을 찾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부대 주변이 한국의 일반 읍내와 다름이 없어서 외박할 만한 곳이 많지 않은 까닭이다.
- 이곳에 배치받을 한국계 미군들이 있다면 소문으로 들어서 알겠지만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오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일단 한번 배치되면 최소 3년에서 길게는 7년 이상까지 다른곳으로 발령도 못받고 이 곳에서만 근무해야한다. 또한 빠져나온다해도 몇년 못 돼서 다시 이곳으로 발령되기 십상이다.
- 미 육군 시스템상 위 내용은 불가능하다. CONUS, 즉 미국 본토안에 있는 부대 소속 미군들은 2~3년에 한번씩 자대 재배치 (PCS)를 할수있다. 자대배치후 3년이 지나기전에 하사 이상은 새로운 부대로 발령 명령서가 나온다. 다시 후드에 있는 부대로 발령받는 경우는 병과마다 틀리지만 기지가 워낙 커서 그렇다. 대부분의 미군은 미국 내에선 텍사스 주의 카바조스,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리버티, 그리고 워싱턴 주의 루이스에 배치가 되는 경우가 많다.
- 2020년에 기지 내 실종되었다가 변사체로 발견된 미군 인원들이 생기는 살인사건들이 발생하였으나 원인은 아직까지도 밝혀진 것이 없다. 이에 미국 육군부는 기지 사령관이자 3군단 부군단장인 스콧 에플란트 소장을 해임, 1기병사단장 제프리 브로드워터 소장은 정직 등 중징계를 내리고 육군미래사령관 존 머리 대장이 이끄는 조사단을 구성하였다.[7] 현재 에플란트 소장은 예정되어있던 1기갑사단장 영전이 취소된 후 북부육군사령관 특별 보좌관을 맡고 있고, 브로드워터 소장은 5군단 부군단장으로 발령이 난 상태이다.[8]
[1]
미국에는 남군 장교의 이름을 딴 기지가 10군데 있으며, 후드 이외로는
로버트 E. 리, P. G. T. 뷰리가드, 브랙스턴 브래그, 레오니다스 포크, A. P. 힐,
게티즈버그 전투에서의 '피켓의 돌격'으로 유명한
조지 피켓 등이 포함된다.
[2]
최츠의 히스패닉계 4성 장군이며,
3군단장과
육군전력사령관을 지냈다.
[3]
전쟁영화 핵소리지의 주인공 도스일병이 소속돼있던 77사단의 사단장이었다. 최종 계급은 중장으로, 복무기간은 1917-1954년이다. 미국의 참전후 17개월 동안 육군의 연구센터장으로 유럽전선에서 싸우게 될 미군의 기갑교리에 영향을 준 인물이고 도중에 소장으로 진급한후, 1943년 5월 77보병사단장으로 발령되어 괌전투를 시작으로 레이테섬 지상전, 오키나와 전투에 이르는 종전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한다. 그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 점령 통치에도 종사하여 홋카이도의 군정장관으로 지내다 전후 군축으로
제77보병사단이 해산되자 주한 미군정에 7사단장으로 잠시 지낸후 미국 본토로 귀국해서 여러 후방보직들을 지내고 전역후 휴스턴 대학교의 총장으로 지낸다.
[4]
2020년 논란이 되었던 바네사 기옌 살인사건이 일어난 부대. 이 파격으로 인하여 IS 토벌에 파견된 3군단장의 대리로 기지 사령관 임무를 수행하던 3군단 부군단장, 3기병연대장 그리고 3기병연대 주임원사는 보직해임되었다.
[5]
2024년 한국에 순환배치되었다 24.02- 24.10
[6]
야전포병 부대이다.
[7]
3군단장 로버트 화이트 중장은 2019~2020년까지 중동 파병을 나간 상태였다.
[8]
5군단은 예하 부대가 없이 사령부와 전방 사령부만 설치되어
유럽-아프리카육군을 지원하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다른 군단 부군단장보다 비중이 작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