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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31a2><colcolor=#ffffff> 발해 제4대 국왕 폐왕 | 廢王 |
|||
출생 | 760년대 추정 | ||
발해 | |||
사망 | 793년 3월 4일 (향년 20대 후반 ~ 30대 초반) | ||
발해 | |||
능묘 | 훈춘 마적달탑 고분(추정) | ||
재위기간 | 발해 제4대 국왕 | ||
793년 3월 ~ 793년 12월 이전(12개월 미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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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31a2><colcolor=#ffffff> 성 | 대(大) | |
휘 | 원의(元義) |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존호 | 없음 | ||
연호 | 미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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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의 제4대 가독부. 문왕의 친척동생이자 고왕의 종손. '폐왕'은 말 그대로 폐위당했기에 붙은 것이다. 재위 기간이 1년이 채 안된다.2. 생애
문왕 대흠무가 죽은 후 원래는 태자인 대굉림이 이어받아야 했으나 대굉림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동생으로 확인되는 대정알(大貞斡)은 당나라에 숙위(宿衛)로 가 있었으며 대굉림의 아들인 대화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승하지 않아 족제(族弟)인 대원의가 왕위에 올랐다.아들과 손자들이 다수 존재하였음에도 족제라는 불분명한 인물이 즉위하였다. 현재 일반적으로 12촌(5종) 이상의 친척부터 족-을 붙여 표현한다. 당시에도 족제를 같은 의미로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왕 말기에 왕위 계승 다툼이 있었기에 이 사태가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성질이 포악하고 시기심이 많아 끝내 신하(국인 - 귀족 세력)들의 반발로 인하여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대원의 시해의 뒷배경에는 문왕의 막내아들이자 제6대 왕인 대숭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왕이 동경용원부로 천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고 폐왕 사후 다시 상경용천부로 천도한다는 점 때문에 폐왕은 발해의 수도 중 하나인 동경용원부를 세력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공식적인 국왕이 아닌 공위 시대를 이끈 임시 국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성왕 시기에 나오는 왕자 대청윤(문왕의 아들)을 사신으로 보낸 기록은 대원의가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대원의가 시해당한 후 왕위는 대굉림의 아들 대화여가 이어받았다.
폐왕 이후 즉위한 성왕부터 간왕까지의 기록은 시호, 휘, 재위 기간, 연호와 같은 기본적인 내용과 아주 적은 내용의 치적밖에 없다. 강왕을 제외한 나머지 군주들은 재위 기간이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5년밖에 안되기 때문에 기록이 적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