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秀 | 優 | 美 | 良 | 可 |
빼어날 수 | 넉넉할 우 | 아름다울 미 | 어질 량 | 옳을 가 |
秀優美良可
과거 일본에서 유래되어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통용되었던 성적평가 제도로 다음과 같이 성적을 분류하였다. '평어제'(評語制)라고도 한다.
100점 만점 | 100~90 | 89~80 | 79~70 | 69~60 | 59~ 0 |
수 | 우 | 미 | 양 | 가 |
절대평가이기에 시험의 난이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점수로는 국어가 95점, 수학이 85점이라서 국어는 수, 수학은 우를 받았는데 석차로는 국어가 상위 20%, 수학이 상위 10%라 한다면, 수·우·미·양·가로는 국어를 더 잘한 것 같아 보이나 국어 문제가 쉬워서 점수가 높게 나온 것일 뿐이므로 실제로 이 학생은 수를 받은 국어보다 우를 받은 수학을 더 잘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문제로 수우미양가 시절에도 서울대학교(2000~2007학년도)처럼 상대평가인 석차백분율을 쓰는 대학이 좀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8년생까지 수우미양가로 해서 2007년도까지는 많은 대학에서 수·우·미·양·가로 내신을 반영했지만, 절대평가라서 내신 부풀리기가 성행한다는 지적에 따라 2005년도 고등학교 입학생, 2008년 대학 입학생부터는 수능 등급제와 같은 방식을 내신에도 적용하는 내신·수능 9등급제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도 여러 문제를 겪고 다시 평어제로 환원되었으며, 2014년도 입학생부터 ABCDE 등급의 절대평가를 병행하여 도입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여전히 대입에서는 상대평가를 고수하고 있다.
중학교의 경우 2011년에 중학교에 입학한 1998년생까지 계속 수우미양가를 유지했다가, 1999년생이 중학교에 입학하는 2012년부터 ABCDE 등급으로 변경되었다. 예체능계 과목도 동일하게 적용되다가 이후 우수-보통-미흡(A~C단계) 3단계로 변경되었다.[1] 이와 동시에 등수 표기가 사라지고, 대신 원점수, 과목평균, 표준편차를 기재하기 시작했다.[2]
대학에서의 절대평가로 성적을 채점하는 경우에도 위의 수·우·미·양·가와 채점 기준이 일치하며 A가 수, B가 우, C가 미, D가 양, E(혹은 F)가 가에 대응한다고 보면 된다.
2. 유래
흔히 일제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사정은 꽤 복잡하다. 일본 교육제도에서 평가단계가 등장한 것은 1897년. '갑을병정'(甲乙丙丁)이라는 단계를 정책적으로 택해 전국적으로 쓰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이는 일본 에도시대의 '갑을'(甲乙) 평가 단계에 기원을 둔 표현이었다고 한다.1900년에는 학적부에 성적을 기재하는 것이 의무화되고 일부 현에서는 통지표가 발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일본 문부성에서 성적 표기 방법을 통일하여 상대평가식 10점법이 도입됐고, 優(우), 良(양), 可(가) 평가 방식은 품행 성적에서만 사용되었다. '갑을병정' 방식도 동시에 사용되기는 된 모양. 지금도 춘추가 90에 가까운 어르신들이 ‘조선어 과목은 항상 ‘갑’을 받았다.’거나 ‘간이학교 때 산수 과목에서 ‘을’ 한 개 받은 것 빼고 나머지는 전부 ‘갑’이었다.’와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1941년에 들어서야 절대평가로서 우리가 아는 '수우미양가' 표기가 전면에 등장하지만 우리가 아는 '수우미양가' 평가 방식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1941년 도입된 절대평가 방법은 優(우), 良(양), 可(가)라는 3단계 평가였고 1943년 들어서야 秀(수), 優(우), 良(양), 可(가), 不可(불가)라는 5단계 평가가 등장했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수우미양가'라고 하지는 않았다. 일제시대에 학교를 다닌 어르신들은 우양가 체계를 체험했기에 지금도 "우"를 1등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전후 당시의 일본 교육계의 권위적인 모습과 절대평가 방식은 반성의 대상이 되었고 전쟁 후에는 일본 사회 전반의 민주화에 발맞춰 학생의 각 재능[3]별로 좋고 나쁨의 정도를 평가하는 독특한 평가방식이 도입되었으나 이런 평가 방식으로는 당시 일본 사회가 원하던 일률적인 서열화를 시키기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 1955년 초중고 전부 통일하여 1~5점으로 학생의 성취를 채점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때의 5점법은 정규분포 7%, 24%, 38%, 24%, 7%에 해당하는 학생에게 5, 4, 3, 2, 1점의 점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일본 초중등학교에서 優, 良, 可 또는 秀, 優, 良, 可, 不可 같은 평가 방법은 길어봤자 4년밖에 쓰지 않아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수우미양가' 방식을 사용한 것은 일제의 잔재라기보다는 '수우미양가'라는 단어에 내포된 교육적 의미를 당시 대한민국의 교육자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도 본래 일본의 평가방식에서는 不可에 해당하는 등급을 可로 바꾸고 중간에 美 등급을 추가한 것은 일제의 잔재가 아닌 대한민국에서 독자적으로 창안한 방식이다.
단, 대학교에서는 와세다대학 등의 일부 사립대학교에서 바리에이션을 넣어 자주 쓰인다.[4] 대개 로마자 성적 표기(A, B, C, D, E)와 같이 쓰인다. 학교마다 달라서 콕 집어 얘기할 수 없다. 초등, 중등교육에서는 사라졌지만 대학에서는 아직 쓰인다.
2.1. 임진왜란으로 인해 유래되었다는 설
김문길 저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라는 저서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신하들에게 적을 베어 온 증표를 보고 사무라이의 등급을 지정했다는 것을 그 유래로 들고 있다. 이윤옥 저 《사쿠라 훈민정음》에서도 수우미양가의 어원을 설명할 때 김문길의 주장을 인용하고 김문길에게 문의한 결과를 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도 그가 전쟁에서 적을 많이 죽이고 코와 귀를 많이 베어냈다 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하사 해준 이름이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신하들이 잘라 온 적의 머리수로 등급을 매겨서 "수우미"로 판정했는데, 토요토미는 수(秀)에 속하니 히데요시(秀吉)이라 했으며 가장 뛰어난 가신이라 하여 토요토미(豊臣)라는 성을 주었다.
김문길,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김문길,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중략) 수우미양가의 정체를 찾아 헤매던 중 의외의 자료를 얻게 되어 확인 차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의 저자인 부산외국어대학 김문길 교수에게 문의한 결과 "히데요시의 秀, 優, 良, 可라는 용어는 센코쿠시대 무사들의 용어로서 무사가(武士家) 문서에 자주 나온다." 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후략)
이윤옥, 《사쿠라 훈민정음》, pp. 83-84, 인물과사상사.
이윤옥, 《사쿠라 훈민정음》, pp. 83-84, 인물과사상사.
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전투가 아닌 내정과 건설(하루만에 성 세우기 등)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과, 토요토미(豊臣)라는 성도 노부나가에게서 받은 것이 아닌 노부나가 사후 1585년 오기마치 덴노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상기한 책들의 주장은 대단히 현실성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5] 또한 위에서 보듯 秀는 優보다 더 늦게 도입된 성적 표기라 과연 500년 전에 優가 아닌 秀를 사용했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옛 이름 '토키치로(藤吉郎)'와 새 이름 '히데요시(秀吉)'를 한동안 병기한 것으로 보이는데[6] 주군(노부나가)로부터 이름을 새로 하사받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에 남았을 것이고 새 이름을 전면에 쓰는 것이 합리적일텐데 '木下藤吉郎秀吉' 식으로 옛이름, 새 이름을 함께 사용했으며, 이름을 하사했다는 오다 노부나가가 직접 보내는 문서에서도 그런 식이었다. 이는 오히려 자기 스스로 이름을 만들어 상당 기간 사용(홍보)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노부나가가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정말 하사했고 이에 대한 1차적 사료가 남아있다면 (수우미양가 논쟁을 떠나서) 전국시대가 인기 많은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히데요시'라는 이름의 유래로서 얘깃거리가 되었을 것인데 정작 그런 자료를 찾을 수 없는 것도 의문이다.
또한 이와 별개로 단순 하사한 것이 아닌, 토키치로가 오다 가문 가신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니와 나가히데와 시바타 카츠이에, 아케치 미츠히데에게서 따와 하시바(羽柴)라는 성과 히데(秀)라는 이름을 받았다는 설이 존재한다.
3. 여담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Academic grading in Japan이라는 표제어로 등록되어 있다.원래는 가장 높은 '수'부터 가장 낮은 '가'까지 모두 제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만[7], 아무래도 성적 평가에 쓰이는 단어다 보니 미 이하는 썩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못하는 일이 많다. 예를 들면 평소에 공부를 상당히 잘하는 편인 학생이 미를 받은 경우 이번엔 좀 미흡했다 혹은 미워 죽겠다고 하거나, 양이나 가밖에 못 받는 성적이 낮은 여학생들을 '양갓집 규수'라고 놀리던가, 가를 (학교에서) 나가, 집이나 가라는 뜻으로 농담조로 통용되는 식이다. 그래선지 교과서에 나오는 평가 등급도 매우 좋음(3개), 좋음(2개), 보통(1개)밖에 없다. 하지만 요즘은 '노력 요함'으로 바뀌는 추세.
조선 시대 서당 혹은 과거시험에서도 수우미양가와 비슷한 방식인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이라는 5단계의 채점 방식을 사용했으며 이 외에도 바리에이션으로 대통(大通), 통(通), 약통(略通), 조통(粗通), 불통(不通)으로 평가하는 곳도 있었고 순통약조불이 아닌 통약투조불(通略鬪粗不) 등으로 평가하기도 했다.[8]
1 대 100에서 수우미양가의 가가 한자로 어떤 것인지 문제로 나오기도 했다. 해당 내용은 1 대 100/찬스 문서를 참조.
일본 서예가 다쿠미가 표현한 여러 나라의 성적 표시 한자.
[1]
예체능은 20점 단위로 등급을 나눠 일반 과목 A, B가 예체능의 A에 해당하고, C, D가 예체능의 B, E가 예체능의 C에 해당한다.
[2]
그보다 더 지나서는 표준편차도 기재하지 않게 되었다.
[3]
친화력이나 글쓰기 실력 등
[4]
예를 들어 가장 기본형인 優, 良, 可에서부터 秀, 優, 美, 良, 可 식의 변형 등 여러 종류가 있다.
[5]
애초에 豊臣이란 성 자체도 그리 좋은 뜻이 아니다. 당시 천황이 천민 출신 히데요시에게 신하는 많은데 자식이 적다는 것을 비꼬기 위해서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
[6]
秀吉라는 이름이 가장 최초로 발견되는 문헌적 근거는 1565년 11월경 노부나가가 미노(美濃)의 토호에게 보내는 문서. 木下藤吉郎秀吉라고 기재되어있다(일본어 위키피디아).
[7]
수(秀): 빼어날 수 - 빼어나다, 우(優): 뛰어날 우 - 뛰어나다, 미(美): 아름다울 미 - 아름답다, 양(良): 어질 량 - 좋다 또는 어질다, 가(可): 옳을 가 - 할 수 있다, 가능성이 있다.
[8]
맹꽁이서당에선 상, 중, 하를 또 상중하로 나눠 상지상(上之上), 상지중, 상지하, 중지상 등으로 나누었다고 나온다. 1등은 장원, 2등은 방안, 3등은 탐화랑이라 부르기도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