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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0><colcolor=#fff> 크로아트 제14대 국왕 페타르 스나치치 Petar Snači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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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페타르 스나치치 (Petar Snačić) |
출생 | 미상 |
사망 | 1097년 (향년 불명) |
재위 | 크로아트 왕국의 제14대 국왕 |
1093년 ~ 10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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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로아트 왕국 제14대 국왕.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의 크로아트 국왕 등극에 반발한 크로아트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칼만과의 전쟁에서 패사했다. 크로아트 왕국의 마지막 크로아트인 계열 국왕이다.2. 행적
크르카 강변의 밀에바츠 고원 경사면에 있는 카미츠코 마을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12세기 초 연대기 사본인 <수페타르의 카툴러리(Supetarski kartular)>에서는 크로아티아의 마지막 반(Ban)으로 언급되었다. 이 사본은 크로아티아 가톨릭 신부, 역사가, 정치인인 프라뇨 라치키(Franjo Rački, 1828 ~ 1894)의 주도로 출간되었는데, 이때 스나치치(Snačić)의 'n'이 'v'로 잘못 기술되어 스바치치(Svačić)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페타르 스바치치'로 일컬어졌지만, 현재는 수정되었다.1091년 스테판 2세가 사망한 후, 드미타르 즈보니미르의 미망인이자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의 여동생인 엘레나 리예파는 오빠에게 크로아트 왕위를 이어받으라고 권고했고, 라슬로 1세는 이에 호응해 크로아트 왕국으로 진군해 사바강 북쪽에 위치한 슬라보니아를 점령하고 크로아트의 왕을 칭했으며, 자기 조카인 알모스 왕자에게 크로아트 영토의 관리를 맡겼다. 하지만 네레트바의 통치자 슬라비츠는 이에 반발해 지르노브니차 강 동쪽 지역을 장악하고 1095년 사망할 때까지 크로아트 국왕을 자처했다. 다른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1093년경 페타르 스나치치를 새로운 크로아트 국왕으로 선출했다.
페타르 스나치치는 크닌을 통치했으며, 달마티아 해안 도시와 사바와 드라바 강 사이의 영역을 다스렸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알모스 왕자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근거는 없다. 크로아트 국왕이 쓰는 왕관인 '즈보니미르의 왕관'은 스플린드 대주교 로브라가 손에 쥐고 있었고, 그에게 넘기길 거부했기에 취하지 못했다. 1095년 라슬로 1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헝가리 국왕 칼만은 크로아트 왕위를 쟁취하기로 마음먹고, 1097년 크로아트 왕국으로 진군했다. 그 해 4월 말 또는 5월 초, 칼만의 헝가리군과 페타르 스나치치의 군대가 그보즈드 산 북쪽 기슭에서 맞붙었고, 페타르 스나치치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훗날 크로아티아인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그보즈드 산을 '페트로바 고라'로 개명했다.
그 후 칼만은 헝가리군을 이끌고 아드리아해에 도달해 비오그라드를 공략했다. 헝가리군의 위협을 받은 트로기르, 스플리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할 테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베네치아 도제 비탈레 2세 미켈레가 이끄는 해군이 함대를 이끌고 달마티아에 접근했다. 베네치아의 원군이 당도하자 함대가 따로 없었던 칼만은 도제에게 협상을 요청했고 협상 결과, 헝가리가 크로아티아 해안 지역을 가지는 대신 달마티아 섬들은 베네치아가 갖기로 했다. 이후 칼만은 드넓은 헝가리 왕국을 경영하느라 바빠서 크로아트 귀족들을 무력으로 일일이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102년 비오그라드 나 모루에서 크로아티아 12개 부족 대표자들을 팍타 수도원에서 접견한 뒤, 그들이 거의 독립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특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크로아트 국왕을 겸임하는 걸 승인받았다. 칼만은 1102년 비오그라드에서 크로아트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고, 이때부터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의 동군연합이 확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