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19:06:11

키니치 하나브 파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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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렝케의 왕
키니치 하나브 파칼
Kʼinich Janaabʼ Pakal
파일:bas-relief-mayan-king-pakal-palenque-chiapas-mexico-198380378.jpg
키니치 하나브 파칼의 석비
<colbgcolor=#008000><colcolor=#fff,#fff> 출생 603년 3월 19일
마야 문명 팔렝케
사망 683년 8월 26일 (향년 80세)
마야 문명 팔렝케
재위기간 팔렝케의 국왕
615년 7월 26일 ~ 683년 8월 26일
무덤 비문의 신전
전임자 삭 쿠크
후임자 키니크 칸 발람 2세
상징 파일:800px-K'inich_Janaab'_Pakal.svg.png

1. 개요2. 생애3. 파칼 왕의 무덤
3.1. 석관 논란
4. 대중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마야 문명의 일원인 도시 국가 팔렝케의 명군.

후고전기의 팔렝케를 다스린 군주로, 그의 왕릉이 도굴당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 발굴되면서 명실상부한 마야 문명에서 가장 유명한 군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부 서양권이나 학자들은 파칼 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의미로 파칼 대왕으로 높여 부른다.[1]

615년 7월에 왕위에 올라[2] 683년 8월까지 무려 68년이라는 엄청난 세월 동안 왕위를 지키면서 세계에서 5번째로 오랫동안 재위한 왕이기도 하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만 따지면 캐나다 엘리자베스 2세 다음가는 2위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장수왕이다. 오랜 재위 기간을 누린 왕답게 팔렝케의 유적들 중 상당수가 파칼 왕의 치세에 세워진 것들이며, 그의 통치 내내 팔렝케는 전성기와 번영을 누렸다고 알려져 있다.

앞서 말했듯이 파칼 왕이 유명한 이유는 팔렝케의 유적인 비문의 신전에서 그의 무덤이 완벽한 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그의 무덤을 덮고 있었던 석관의 부조가 마치 초고대문명설을 떠올릴 법한 디자인으로 독특하게 생겨서 온갖 유언비어나 음모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실제론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고, 석관의 기묘한 모습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다보니 마치 초고대문명설의 유물처럼 보였다는 것이 주류 의견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2. 생애

키니치 하나브 파칼이 태어났던 603년의 팔렝케는 꽤나 험난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팔렝케는 당시 한창 이웃 도시국가들에게 치여서 빌빌거리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키니치 하나브 파칼 역시 이 기구한 상황에서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가 태어나고 2년 후인 605년에는 호전적인 강대국인 칼라크물이 군대를 이끌고 팔렝케로 쳐들어왔다. 칼라크물은 팔렝케의 원래 왕을 쫒아내고 대신 새로운 꼭두각시 왕을 세웠다. 그러나 그 후에도 칼라크물은 610년과 611년에 팔렝케를 침략하여 약탈하며 끊임없이 괴롭혔다.

파칼은 원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정식 후계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칼라크물의 침략으로 기존 왕족과 후계자들이 싸그리 죽거나 제물로 바쳐지면서[3] 모계 쪽으로 왕통을 이어받은 파칼이 어부지리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원래라면 부계로만 왕위 계승권이 인정되었던 마야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파칼의 모친이었던 삭 쿠크는 왕족 출신이었는데, 정통 남자 후계자들이 모두 죽어버리자 대신 자신의 아들을 팔렝케의 국왕으로 세웠다. 그렇게 파칼이 왕위를 물려받았을 무렵 그의 나이는 12세였다.

626년에는 인근 욱스테쿠에서 태어난 익스 트착부 아하우와 결혼했다. 참고로 익스 트착부 아하우는 원래 팔렝케 왕실의 혈통을 물려받은 여인이었다. 파칼이 자신의 부족했던 정통성을 이 결혼을 통해서 메우려 했다는 추측이 유력하다. 이후 파칼은 끊임없는 확장을 통해서 팔렝케의 영토를 크게 넓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렝케는 마야 문명권의 서부 권역을 주름잡는 강대국으로 빠르게 떠올랐다.

628년에는 인근 도시 산타 엘레나의 아하우(국왕)를 사로잡아 팔렝케 한복판에서 처형했고, 산타 엘레나[4]를 팔렝케의 조공국으로 복속시켰다. 특히 파칼은 자신의 어머니인 삭 쿠크를 팔렝케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이 전투에 나가있는 동안 팔렝케를 대리 통치하도록 했는데, 삭 쿠크가 성실히 팔렝케를 대신 보살피면서 안정적으로 국정을 수행할 수 있었다. 659년에는 인근의 소도시 피파를 침략하여 아하우를 잡아죽였고 또다시 산타 엘레나를 침공해 9명의 포로들을 끌고 갔다.

44세가 될 때 즈음에 파칼은 팔렝케에 새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파칼은 자신의 오래디 오랜 재위 기간에 걸맞게 수많은 건축물들을 팔렝케에 대규모로 지어댔는데, 당시 팔렝케의 건물들은 마야 문명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화려한 편에 속했다. 파칼이 지은 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팔렝케의 궁전이다. 물론 이전에도 궁전은 있었지만 파칼이 예식용 홀을 짓고 꾸미면서 몇 배로 확장하고 으리으리하게 증축한 것이었다. 특히 파칼은 독특하게도 하얀색으로 궁궐 건물들을 올리는 걸 좋아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붉은색으로 건물을 칠하는 것과는 차별화되는 취향이었다.

그렇게 파칼은 80세에 이를 때까지 꾸준하게 정복 활동을 펼쳐나가며 오랫동안 팔렝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수많은 건물들을 증축하면서 당시 팔렝케를 마야 문명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강대국으로 만들었고, 덕분에 팔렝케는 오랜 평화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파칼은 683년 8월에 자신의 궁전에서 눈을 감았고, 승하한 후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신격화되었다. 그의 시신은 비문의 신전에 묻혔고 아들인 키니치 칸 발람 2세가 팔렝케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3. 파칼 왕의 무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파칼 왕의 무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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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nscriptions_150dpi-1_bbu2tw.webp
파일:Temple-of-Inscriptions-Palenque-Mexico-mountain-element.webp
복원 내부도[5] 비문의 신전
중흥의 명군이었던 파칼 왕은 당시 팔렝케에서 가장 거대한 계단식 피라미드에 묻혔다. 마야어로는 볼론 예즈 테 나, 즉 '아홉 개 날카로운 창의 집'이라는 뜻의 건물로 현대에는 '비문의 신전'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비문의 신전이 파칼 왕이 사실상 가장 유명한 이유이기도 한데, 마야 문명에서 거의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왕의 무덤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마야의 무덤들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려져 마야인들에게 약탈당하거나 훼손되어서[6] 파괴된 경우가 많았는데 파칼의 무덤은 완벽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마야 학자들은 거의 투탕카멘의 무덤급의 성과로 보기도 한다.

파칼 왕의 무덤이 있었던 비문의 신전은 이미 오래 전에 발굴과 조사가 끝난 건물이었고, 1900년대 중반까지도 무덤의 존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48년, 멕시코의 고고학자 알베르토 루즈 루일리어가 신전 바닥에 뚫려있는 구멍을 발견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신전 바닥에 깔린 거대한 석판을 들어내고 그 아래에 있었던 통로에 가득 차있던 자갈들을 치우는 데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952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파칼 왕이 묻혀있었던 석실에 도달했고, 석관 속에는 으로 된 데스마스크와 각종 장신구들을 착용한 파칼 왕의 유해가 조용히 누워있었다. 석실 벽에는 석회칠 위에 마야 신화에서 왕이 신격화되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파일:Ajuar_funerario_de_Pakal_el_Grande_(Museo_Nacional_de_Antropología).jpg
파일:Pakal-56a58a8d5f9b58b7d0dd4cb3.jpg
석실 내부[7] 옥 부장품
다만 무덤에서 발견된 유해가 파칼 왕 본인의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유골의 치아 마모도를 분석해본 결과, 해당 유골의 주인이 죽을 때 40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기록상으로 파칼 왕이 80세라는 당시로선 엄청난 고령에 죽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충분히 의심이 들만하다. 게다가 석실의 벽화에서도 파칼 왕이 70년 동안 재위했다는 내용이 대놓고 그대로 적혀있었기 때문에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 할 수도 없다. 또한 유골의 자세가 워낙 가지런한 걸 보면 도둑 매장[8]인 것도 아니다. 현재 고고학자들은 파칼 왕이 아무래도 왕이다보니 부드러운 음식만 먹고 살아서 치아가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마모되는 정도가 덜해서 측정에 오차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2016년에 비문의 신전 아래에 지하 수로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8년 8월에는 파칼 왕의 데스마스크가 발견되었다.

3.1. 석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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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a0011675_490ee7af63fb2.jpg
파칼 왕의 석관 덮개

그의 무덤으로 알려진 비문의 신전에서 발견된 석관 덮개의 문양이 마치 뭔가를 타고 가는 사람을 새긴 것으로 보이자, 에리히 폰 데니켄은 이 석관 덮개의 문양이 UFO의 착륙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해 초고대문명설의 논쟁을 개시했다. 데니켄은 1968년에 펴낸 책 《신들의 전차》에서 덮개에 그려진 왕의 모습이 1960년대 미국의 우주계획인 머큐리 계획에 참가하는 우주비행사들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아래쪽에는 화염을 분사하는 로켓 비슷한 문양이 있다는 주장까지 덧붙였다. 곧 마야 문명 시대에 외계 생물들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는 마야의 종교와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라는 것이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실제로 문양을 가로로 놓고 본다면 우주선 운운하는 소리가 나올수도 있지만 세로로 세워놓고 본다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파일:attachment/a0011675_490eea7faf28e.jpg 파일:c50vxfelg1d21.jpg

마야의 왕을 상징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엇보다 왕릉에서 석관 덮개 그림이 나오면 누구 것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는가? 게다가 마야는 이집트와 같은 제정일치 사회는 아니었다.[9] 따라서 마야의 다른 유적들의 문양을 살펴보면, '위대한 왕'으로 대표되는 마야의 왕이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과 인간형 용의 모습을 한 케찰코아틀이 엄연히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앞서 말했듯 파칼 왕의 경우, 제정일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므로, '신으로서의 왕'이 그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석관 덮개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덮개 모서리를 둘러싸는 띠 위에 태양, 달, 별과 같은 천체들이 그려져 있고 6명의 귀족들을 묘사한 상징이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석관 가운데에는 큼지막하게 십자 형태의 거대한 세계수가 그려져 있고, 누워있는 파칼 왕 바로 아래에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하늘 뱀이 정면을 바라보는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파칼 왕 주위에는 죽음의 뱀이 입을 쩍 벌린 상태로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파칼 왕이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상징한다.[10] 파칼 왕 본인은 부활을 관장하는 옥수수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슴에는 거북이 장식을 올리고 있고 독특한 자세로 누워있는 모습이다.

석관 덮개 외에도 파칼 왕의 옥가면이라는 데스마스크로 사용된 유물도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유골의 얼굴 부분에 씌워져 있었다. 옥조각을 모자이크 기법으로 정교하게 조각하여 만든 가면으로 당시 마야의 공예와 세공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유물 중 하나이다.[11] 게다가 얼마 남지 않은 마야의 옥 유물이기 때문에 굉장히 가치가 높다. 또한 대다수의 데스마스크가 생전에 인물의 모습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파칼 왕의 외모를 단편적으로라도 알 수 있기에 그 중요도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4. 대중 매체에서


[1] 파칼은 마야어로 '방패'라는 뜻이다. [2] 팔렝케의 역대 왕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21명의 왕 중 한 명으로 왕계표 순서상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알려진 것 중에서는 12번째이다. [3] 당시 마야 문명에서는 전쟁에서 진 쪽의 지배층이 포로로 잡혀가거나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흔했다. [4] 서양인들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마야인들이 무어라 불렀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5] 색이 다 벗겨진 지금과 달리 마야 문명 시대에는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외벽이 칠해져 있었다. [6] 의외로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아니라 마야인들이 약탈한 경우가 훨씬 많다. 마야의 도시들은 오래 전에 폐허로 전락해서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었고, 마야인들이 직접 도굴꾼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7] 실제 석실은 아니고 멕시코 국립고고학 박물관 내부에 실제와 똑같이 1:1로 석실을 재현한 모습이다. [8] 후대에 원래 주인의 시신을 파내고 대신 자신의 시체를 안장하는 것. [9] 정확히 말하자면 제정일치의 시도는 있었다. 10세기 경 멕시코 고원 지역 톨테카의 왕 토필친(Topiltzin)에 관련하여 이를 암시하는 신화가 남아 있는데, 결과적으로 토필친은 패배하여 동쪽으로 떠난다. 즉 제정일치를 통한 중앙 집권 강화가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신화는 마야 지역에도 유사한 형태로 남아있다. 여담이지만 이 토필친이 동쪽으로 떠나며 나중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는 신화가 전해져, 스페인의 침략 시기 흔히 알려진 '백인들을 신으로 모신 원주민들'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실체는 좀 복잡하지만. [10] 마야 신화에서 사후 세계의 입구는 뱀의 아가리 모양이었다. [11] 야금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마야 문명에서는 황금이 아니라 을 가장 값비싼 물질로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