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투생 루베르튀르 Toussaint Louvertu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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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랑수아도미니크 투생 루베르튀르[1] François-Dominique Toussaint Louverture |
출생 | 1743년 5월 20일 |
프랑스 왕국 생도맹그 | |
사망 | 1803년 4월 7일 (향년 59세) |
프랑스 제1공화국 | |
직업 | 군인, 혁명가, 독립운동가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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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티의 독립운동가.아이티 혁명을 이끌고 생도맹그의 노예제를 끝낸 인물이며, '검은 나폴레옹(Le Napoléon Noir)'으로 불릴 만큼 아이티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힌다.[2]
2. 생애
투생은 본래 노예로 태어났으나 주인에 의해 해방되었다.[3] 이후 프랑스 식민지군에 입대하기도 했고 똑같이 해방된 노예들[4]이나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아이티 혁명 당시에는 혁명군을 이끌어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노예들을 해방했으며, 1798년에는 자메이카에서 파견된 영국군까지 물리쳤다. 뒤이어 산토도밍고까지 진격해 산토도밍고의 노예들을 해방시켰고, 1801년 생도맹그에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총독이 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1802년 샤를 르클레르(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5]를 생도맹그에 파견했다. 르클레르는 투생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투생은 '우리의 힘을 보여줬으니 프랑스도 진지하게 협상에 임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협상장으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의외로 다른 혁명가들은 투생을 구명하지 않았는데[6] 투생이 자신들과는 달리 생도맹그의 완전 독립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7]
프랑스로 끌려간 투생은 1803년 옥사했다.
3. 여담
투생은 스파르타쿠스를 모델로 삼았고, 검은 스파르타쿠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오늘날 전해지는 투생의 초상화는 모두 외모가 제각각인데, 초상화를 그린 사람들 중 투생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라고 한다.
젊은 시절 이름은 투생 브레다였다.
투생의 아들은 이삭 루베르튀르(Issac Louverture)이며 그는 아버지의 어린시절에 대해 간략한 기록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투생의 아버지는 아프리카 왕자였으며 포로로 잡혀 생도맹그에 노예로 끌려왔다. 같은 종족의 여인과 결혼해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장남이 바로 투생이다.
[1]
본명은 프랑수아도미니크 투생(François-Dominique Toussaint). 루베르튀르는 프랑스어 L'Ouverture에서 유래하여 자신이 직접 붙인 성씨로, '시작'(ouverture. l'은 정관사)을 의미하며 여기서 더 나아가 '개척자'를 뜻한다.
[2]
더 놀라운 점은 투생이 독학으로 전술을 배웠다는 점이다.
[3]
이 주인은 혁명 직전에 투생이 미리 프랑스 본토로 피신시켰다.
[4]
투생 말고도 해방된 노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옛 주인의 집사로 일했다.
[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둘째 여동생 마리 폴린 보나파르트와 결혼했다.
[6]
심지어
장자크 데살린은 투생의 체포에 협조하기도 했다.
[7]
투생이 친불파였던 건 아니고 괜히 독립했다가 다른 열강의 간섭을 당할 것을 우려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