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군사 작가에 대한 내용은 톰 클랜시 문서 참고하십시오.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 | |||
패디 클랜시 | 토머스 클랜시 | 토미 메이컴 | 리엄 클랜시 |
토머스 클랜시 Thomas Clanc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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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4년 11월 29일 |
아일랜드 카운티 티퍼레리 캐릭 온 수어 | |
사망 | 1990년 11월 7일 (향년 66세) |
데뷔 | 1956년 1집 앨범 'The Rising of the Moon' |
소속 | [1] |
종교 | 천주교(세례명: 토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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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의 가수이자 클랜시 브라더스의 멤버.2. 일생
아일랜드 티퍼레리 주(County Tipperary)의 캐릭 온 수어(Carrick-on-Suir)에서 1924년에 태어났다.4남 7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고, 형은 패디 클랜시(1922~1998), 동생은 보비 클랜시(1927~2002), 리엄 클랜시(1935~2009).
아일랜드 포크 음악 그룹인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로 활동했던 아일랜드의 가수이나, 처음 연예계에 나왔을 때는 엄연히 배우였다. 실제로 가수 활동을 하다가도 연기판에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멀쩡히 돌아가던 그룹이 해체되기도 했을 정도.
아주 젊었을 때는 형 패디와 함께 IRA에 소속되어 아일랜드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직업에 독립운동가가 있는 것은 이 때문. 패디와 톰은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1947년 캐나다로 건너가 온갖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던 패디와 톰은 1951년 미국으로 넘어와,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뛰어들게 된다. 물론 이 때는 절대 가수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배우로서 한 것이다.
이 때 패디와 톰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 가운데 다이앤 해밀턴(Diane Hamilton)이라는, 뭐라고 직업을 나타내기는 미묘하지만 요즘으로 따지자면 PD라고 할 수 있는 음악가가 있었다. 이 PD는 1955년 아일랜드의 고전 포크송들을 채록하기 위하여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리고 아일랜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시골 사람들이 부르는 민요들과 바이올린 연주곡들을 녹음기로 녹음해 와서는, 미국에서 패디 클랜시가 사장으로 있던 트래디션 레코드(Tradition Record)를 통해 앨범으로 만들어 발매했다.
그런데 이 '시골 사람들' 가운데에는 다름아닌 패디와 톰의 남동생인 리엄 클랜시와 여동생인 조안 클랜시, 페그 클랜시가 있었고, 또한 리엄 클랜시의 절친이었던 토미 메이컴과 그 어머니 세라 메이컴이 있었다. 졸지에 형들을 제치고 막내가 처음으로 음악계에 데뷔한 셈.
이 앨범은 지금도 구할 수 있고 심지어 다음 뮤직에서 팔기까지 하는데, 막상 들어 보면 그냥 시골 사람들 노래하는 걸 녹음해 놓은 거라 반주도 없고 굉장히 소박하다. 그러나 리엄 클랜시와 토미 메이컴의 데뷔 앨범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듯.
그리고 토미 메이컴은 이 해 말에, 그리고 리엄 클랜시는 이듬해인 1956년에, 역시 연기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패디와 톰, 리엄과 토미가 서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토미 메이컴이 인쇄소에서 일을 하다가 2톤짜리 철제 프레스에 손이 깔리는 대형사고를 당하게 된다.
아무튼 이 사건 직후, 각자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패디, 톰, 리엄, 토미가 의기투합하여 앨범을 하나 녹음을 하여, 패디 클랜시가 운영하는 레이블인 트래디션 레코드를 통해 발매를 하게 되었다. 물론 결코 공식적으로 가수로 데뷔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취미로. 모두 14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공통점은 모두 아이리시 레벨 송(Irish rebel song), 즉 아일랜드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는 반영가요라는 것이다.
이 앨범의 제목은 <The Rising of the Moon>. 이것은 문자 그대로 급조 그 자체여서, 악기 소리라고는 패디 클랜시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만 들린다. 토미 메이컴이 아일랜드 전통 관악기인 틴 휘슬과 드럼을 비롯한 몇 가지 악기를 다룰 수 있지만, 당시 메이컴은 손을 거의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급조한 앨범인데도 엄청나게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당시 이 4명은 전혀 음악계에 뛰어들 생각조차 없었고 그냥 재미에 가깝게 만든 앨범이었는데도 이런 흥행을 기록한 것. 1959년까지 3년간 이 4명은 철저하게 연기판에 집중했지만, 1959년 다시 본격적으로 음악판에 뛰어들 시도를 하게 된다.
일단 3년 전에 발매한 급조한 앨범에서 불렀던 곡들을, 이번에는 패디 클랜시의 하모니카는 물론이고 토미 메이컴의 틴 휘슬과 드럼 반주에, 다른 세션맨들의 기타와 하프 반주까지 덧붙여 새로 녹음했다. 이렇게 해서 4명은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 그룹 이름은 '클랜시 형제들과 토미 메이컴'(The Clancy Brothers and Tommy Makem), 곧 클랜시 브라더스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클랜시 브라더스는 메인 보컬과 서브 보컬의 구분이 없다. 톰 클랜시의 경우 100% 보컬 전담으로 앨범 크레디트에는 나오는데, 유튜브 동영상 중에는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영상도 있다. 어쨌든 톰 클랜시의 역할은 메인 보컬.
목소리는 네 형제들 가운데 가장 낮고 걸쭉한 저음이다. 톰의 목소리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걸쭉하고 소박한 저음'. 로이킴처럼 감미로운 저음은 아니지만, 상당히 중후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이다. 아무런 악기도 다루지 않으니 메인 보컬이라 할 만도 한데, 사실 톰 클랜시가 메인보컬을 부른 곡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따라서 다른 멤버가 메인 보컬을 부르는 곡에서는 톰은 코러스가 나올 때까지 그냥 멍 때리고 서 있거나 박수만 짝짝 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걸그룹이라면 댄스도 있고 랩도 있지만 클랜시 브라더스는 포크 음악 그룹이니 그렇게 된 것.
http://clancybrothersandtommymakem.com/wel.htm
위 링크에 들어가면 네 멤버들의 1960년대 사진을 볼 수 있다. 왼쪽 두 번째가 톰이다.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가수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톰 클랜시 역시 외모로 승부하는 타입은 결코 아닌 듯. 만일 2010년대의 한국에서 데뷔를 했다면 아마 (네 멤버들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외모지상주의의 최대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머리도 크고, 키도 작고, 배도 나왔고, 게다가 이 집안에는 탈모 유전자까지 있으니...그러니 (이 장르의 가수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철저한 실력파 가수라 할 수 있다.
그래도 탈모는 형인 패디나 동생인 리엄에 비하면 덜한 편. 1970년대 후반 이후 패디와 리엄은 아예 모자를 푹 눌러쓰고 출연을 했는데, 톰은 그냥 다녔다. 어쨌든 아일랜드 포크 음악이라는 장르가 일반적인 대중 음악과는 달라서 가수의 외모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철저하게 가수의 실력만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분야이니, 한국 아이돌 가수들을 평가하는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대놓고 귀요미 콘셉트를 시전하는 막내 리엄 클랜시만큼은 아니지만 은근히 귀염을 떨 때도 있다. 작은 키와 둥글둥글한 외모가 해학적인 귀여움을 유발하는 듯.
1969년 토미 메이컴이 그룹을 탈퇴하고, 셋째인 보비가 합류했을 때는 그대로 그룹에 남았다. 1971년 보비가 탈퇴하여 잉글랜드인인 루이스 킬런이 합류했을 때도 그대로 그룹에 남았지만, 70년대 들어 연기판에 다시 뛰어들면서 음악 활동에는 별로 안 나서더니, 1974년에는 마침내 연기 활동을 위해 그룹을 통째로 공중분해시키기까지 했다.
그룹 해체 이후 3년간 정말 미친 듯이 연기에 집중하다가, 1977년 다시 그룹이 복원되었을 때 멤버로 합류했다. 이 때 멤버는 패디, 톰, 보비, 그리고 조카인 로비 오코넬. 원래 동생인 리엄 클랜시를 설득했으나, 당시 리엄 클랜시는 문자 그대로 어려서부터 절친이었던 토미 메이컴과 듀엣으로 활동하며 아일랜드 음반 차트 1위에 오르는 엄청난 히트를 올리고 있었기에 당연히 거절했다.
이 때 복구된 클랜시 브라더스는 풀 타임 그룹이 아니고 1년 중에 한 3번 정도만 모여서 음악 활동을 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각자 흩어져 개인 활동을 하는, 요즘 걸 그룹과 비슷한 시스템을 취했다. 그런데 그 '개인 활동'이라는 게 톰은 당연히 연기고, 로비 오코넬은 솔로 가수 활동이지만, 패디 클랜시는 목장 경영이고 보비 클랜시는 보험회사 경영이다. 자세한 것은 패디 클랜시, 보비 클랜시 항목 참조.
1984년,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듀엣의 매니저가 긴급 제안을 하게 된다. 클랜시 브라더스가 한참 잘 나가던 리즈 시절인 1960년대 라인업으로 복귀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것. 이 제안에 따라 1984년의 클랜시 브라더스 리유니언 투어(The Clancy Brothers Reunion Tour)가 성사된다. 네 멤버들은 미국과 아일랜드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했고, 토미와 리엄의 레이블이었던 샤나키(Shanachie)를 레이블로 하여 앨범도 냈다. 당시 클랜시 브라더스의 레이블은 뱅가드(Vanguard) 레코드였지만, 토미와 리엄 듀엣의 인기가 하도 절정이었던 관계로.
1980년대의 톰 클랜시.
1986년부터 다시 원래 멤버들로 복귀한 클랜시 브라더스는 이후 1988년에 앨범을 하나를 냈지만, 본인들도 쓰레기라고 평가할 정도로 조잡하고, 대부분의 곡들이 예전에 정말 미친 듯이 마르고 닳도록 불렀던 곡들이라서 본인들조차도 별로 가치를 두는 앨범은 아닌 듯. 그런데 이것이 그만 톰 클랜시의 마지막 앨범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1990년 톰 클랜시는 위암 진단을 받았다. 이미 투어 일정은 다 짜놓았는데 그걸 빵꾸를 낼 수는 없는 관계로, 1988년 이후 솔로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리엄 클랜시가 그룹에 복귀하게 되었다. 물론 이 때는 그냥 땜빵 차원이었지만 톰 클랜시의 상태는 결코 호전되지 않았고, 11월 3일 톰은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톰 사후, 1991년 봄부터 리엄이 톰을 대신하여 멤버로 합류하였다. 톰 클랜시는 1남 5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막내딸은 1988년생으로 톰 클랜시가 세상을 떠났을 때 2살이었다. 보비 클랜시의 딸 이파 클랜시나 아들 핀바 클랜시, 리엄 클랜시의 아들 도널 클랜시처럼 가수로 데뷔했다는 이야기는 없는데, 아직 20대 중반인 것을 감안하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톰 클랜시의 부인 조안 클랜시는 현재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1]
아일랜드 가수는 한국 가수와 달리 소속사 개념이 없다. 레이블은 다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