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57:36

토머스 모브레이(제4대 노퍽 백작)

성명 토머스 모브레이
Thomas Mowbray
생몰년도 1385년 9월 17일 ~ 1405년 6월 8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엡워스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요크
아버지 토머스 모브레이
어머니 엘리자베스 피츠앨런
형제 마거릿, , 이사벨라, 엘리자베스
아내 콘스탄스 홀랜드
직위 제4대 노퍽 백작, 제2대 노팅엄 백작, 제7대 모브레이 남작, 제8대 세그레이브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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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헨리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한 뒤 처형되었다.

2. 생애

1385년 9월 17일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엡워스에서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와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인 엘리자베스 피츠앨런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두번째 왕비인 발루아의 이자벨의 궁전에서 자랐다. 1398년 아버지가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결투 재판을 벌이려 했다가 리처드 2세에 의해 헨리와 함께 추방당했다. 이후 그는 리처드 2세에게 연금을 지급받았다.

1399년 5월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동행했다. 그해 여름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에 몰래 상륙한 뒤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아일랜드에서 급히 돌아온 리처드 2세를 사로잡은 뒤 폐위하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등극했다. 얼마 후, 그의 아버지가 베네치아에서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후 헨리 4세는 그에게 노퍽 백작, 노팅엄 백작, 모브레이 남작, 세그레이브 남작위를 물려받는 걸 허용했지만, 노퍽 공작위는 물려받지 못하게 했다. 또한 아버지가 맡았던 백작 원수직은 1399년 10월 30일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에게 수여되었다. 모브레이의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처음에 남편의 재산으로부터 아무런 연금도 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연금을 받을 자격을 부여받았다.

1399년 12월, 모브레이는 추밀원이 더 높은 연금을 요청했다. 이에 추밀원은 매년 350마르크를 그에게 부여하기로 했고, 1399년 크리스마스에는 58파운드의 일회성 보조금을 지급했다. 1400년 8월, 모브레이는 1391년에 약혼했던 콘스탄스 홀랜드와 결혼했다. 1391년 당시, 양가 부모는 모브레이와 콘스탄스에게 연간 수입이 300마르크인 땅을 주었고, 두 사람이 어린 것을 고려해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수탁자로 선임해 관리를 대신하게 했다. 이제 왕이 된 헨리 4세는 1403년 11월 모브레이에게 아버지의 상속 재산 대부분을 부여했으며, 몇 주 후에는 1399년에 사망한 노퍽 여공작 마거릿 브라더튼의 광범위한 유산 일부를 모브레이에게 줬다. 모브레이는 이를 통해 연간 소득이 약 1,500파운드인 부동산을 취득했다. 엡워스 성 역시 모브레이 가문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지만, 헨리 4세는 이 성의 통치를 제2대 요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에게 넘겼다. 모브레이는 이 성을 인수하기 위해 1,100파운드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1404년 20명의 맨앳암즈와 60명의 궁수와 함께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1년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는 그해 내내 웨일스의 쳅스토우 성에만 머무르다가 1404년 가을이 되어서야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는 그가 명령을 어기고 웨일스에서 복무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이 시기, 그는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제5대 바르톨프 남작 토머스 바르돌프, 요크 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와 헨리 4세를 대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헨리 퍼시, 리처드 르 스크루프와 개인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윈저 궁에서 모티머 가문의 상속인이며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에드먼드 모티머와 로저 모티머 형제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알고 있었다. 헨리 4세는 사건 조사 중에 토머스 모브레이가 그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걸 밝혀냈지만 딱히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1405년 3월 1일, 모브레이는 제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와 추밀원과 의회 에서의 우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이때 헨리 4세가 리처드 뷰챔프를 두둔하자 그는 강한 반감을 품고 반란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1405년 4월, 헨리 4세는 그에게 20명의 맨앳암스와 120명의 궁수를 이끌고 웨일스까지 진군해 오와인 글린두르와 상대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고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루프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로 가서 헨리 퍼시와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끄는 군대는 쉽턴 무어에서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군대와 마주쳤다. 랄프 네빌은 모브레이와 스크루프에게 회담을 제안했다. 모브레이는 망설였지만, 스크루프는 회담에 동의했다. 그들이 와인을 마시면서 랄프 네빌과 자신들의 요구 사항에서 합의를 내려고 논의하고 있을 때, 그들의 군대는 왕실군의 급습으로 무너졌다. 결국 군대를 잃은 모브레이와 스크루프는 체포된 뒤 폰테프렉트 성에 구금되었다.

1405년 6월 8일 요크에 도착한 헨리 4세는 두 사람 모두 참수형을 선고했다. 요크 주교 리처드 스크루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보이는 모브레이를 위로하고, 그가 먼저 사형대에 오르도록 허락했다. 그는 처형된 뒤 요크의 프란체스코 교회에 안장되었고, 잘린 머리는 두달 동안 요크의 성문인 부트햄 바에 전시되었다가 몸통과 함께 무덤에 안치되었다.

3. 가족

  • 콘스탄스 홀랜드(1387 ~ 1437): 초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와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1]의 딸. 토머스 모브레이가 사망한 뒤 1413년 기사 존 그레이와 재혼했다.


[1] 곤트의 존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