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01:58:32

사도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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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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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12사도 중 7사도
토마스 | Thomas
파일:800px-Rubens_apostel_thomas.jpg
성(聖) 토마스 | 루벤스 작(作)
<colbgcolor=#806600> 출생 기원전 1년
로마 제국 갈릴래아 판사다
사망 72년 12월 21일 (향년 71~72세)[1]
촐라 왕국 성 토마스 산[2]
축일 7월 3일 ( 가톨릭)
10월 6일 ( 정교회)
상징 쌍둥이, 연꽃[3], [4], 측량자[5], 손가락[6]
사인 창에 찔림
종교 기독교
수호성인 인도, 스리랑카, 타밀나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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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תוֹמָאס הקדוש
그리스어 Θωμᾶς
라틴어 Thomas
영어 Thomas the Apostle ( 토마스)
한국어 공동번역 성서 : 토마
가톨릭 : 토마스
개신교 : 도마 }}}}}}}}}

1. 개요2. 생애
2.1. 성격2.2. 부활을 의심하다2.3. 순교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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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년~서기 72년 12월 21일(율리우스력)[7]

예수 12사도의 한 사람. 성인으로서의 축일은 7월 3일이며 건축가, 예술가, 목수, 측량사, 재판관, 건축업자, 조각가의 수호성인이다. 대표적인 상징물은 성모 마리아가 승천되면서[8] 그에게 주었다던 허리띠.

' 토마스'는 한국 천주교에서 쓰는 명칭이며 공동번역성서에서는 ' 토마'가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에서 쓰는 개역 성경에서는 ' 도마'[9]라고 하고 성공회에서는 토마가 공식 표기지만 토마스도 혼용한다. 디디모스(Δίδυμος / Dídymos, 개신교 표기는 '디두모')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그리스어로 쌍둥이라는 의미다.

2. 생애

2.1. 성격

제자들이 "선생님, 얼마 전만 해도 유다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그 곳으로 다시 가시겠습니까?" 하고 걱정하자[10],
-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11:8
그래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라자로는 죽었다.[11]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 곳으로 가자." 그 때에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가 자기 동료인 딴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12] 하고 말하였다.
-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11:14~16
예수를 따르던 때는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엉뚱한 반응을 하기도 하고 가장 열성적이고 강직한 제자들 중 하나였다. 자신을 죽이려는 유다 지방 사람들을 피해 온 예수가 다시 라자로를 살리려고 유다로 가려고 하자 다른 제자들은 말리지만 토마는 죽음을 불사하고 따르자고 한다.

2.2. 부활을 의심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aravaggio_-_The_Incredulity_of_Saint_Thomas.jpg
<의심하는 도마>, 카라바조,1601~1602, 상수시 궁전

예수 십자가 죽음 이후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예수의 손과 옆구리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나서야 믿겠다고 말하였고 실제로 예수가 나타나서 '손가락을 옆구리로 넣어봐라'라고 했다. 손가락을 옆구리에 넣지 않았지만 직접 보고서야 예수를 주라고 인정하였다.[13] 고로 위의 성화는 틀린 것. 이 구절은 의심 많은 믿음이라는 설교의 예화로 자주 등장한다. a doubting Thomas('의심 많은 사람', '증거없이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라는 영어 표현의 유래이기도 하다. 워낙 이 예화가 유명해서 토마스의 성화 성상에는 손가락이 강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둥이(디두모)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 공동번역성서 요한 복음서 20:24~29

이 사건 때문인지 개신교 주일학교에서는 별로 이미지가 좋지 못한 경우가 있다. 공관복음서에는 그 밖에 딱히 인상적인 행적도 없고. 요한 복음서를 통해 보았을 때 성격은 엄청나게 급하고 덜렁거렸던 모양. 반면 가톨릭 성공회에서는 사도 토마스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다. 우선 그의 성격이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성향의 보유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어느 정도는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무언가를 의심하면서도 그 본질을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하는,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존재를 늘 의심하면서도 하느님의 본질을 알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며 실상은 하나도 모르면서도 그게 들킬까봐 질문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거나, 자신의 신념을 확고하게 고백하지 않고 회의하다 제 때에 알고 배워야 할 것을 자주 놓치게 되어 여러 면에서 진보가 더디고 깨우침이 느리거나 없게 되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도 지적한다. # 아울러 그런 의심조차 '불경하다'며 피하거나 내치는 일 없이 '봐라'라며 제자의 의혹을 풀어주고, 확신으로 가득 채워주었던 예수의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

맹목적인 신앙을 지지하는 광신도들은 으레 이 구절을 들이밀며 '봐라 예수님도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셨으니 너희도 의심 같은 거 하지 말고 닥치고 믿으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수사학의 관점에서 예수가 토마스에게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사가 뭐든지 안 보고도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역설법을 사용한 탄식에 가깝다. "보지 않고 믿어야 복된 사람"이라는 단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지 않고 믿으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고, 뭐든 스스로 확인하고 체득해보고 난 다음에야 지혜든 지식이든 터득할 수 있다"고 어떤 희망적이지만 불가능한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현실에서의 필수적인 문제점과 요소를 더욱 강조하고 부각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비슷하게 이스카리옷 유다에게도 예수는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했는데 이는 자신을 배반한 유다의 행동에 대한 저주나 분노라기보다는 유다 자신도 정해진 운명의 수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가엾은 놈, 어쩌면 좋을까." 정도의 뉘앙스가 들어간 스승으로써의 탄식에 가깝다.[14]

이러한 성격을 가진 토마스이기 때문에 그의 고백은 성경 속에서 더욱 강력한 설득력과 파급력을 가진다. 토마스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이라는 고백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설명하는 기독교에서는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예수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의 신성을 의심한 것에 대한 회개의 울부짖음과 참된 그리스도이자 메시아의 현현에 대한 환희, 좀 더 깊게 파고들면 예수를 단순한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하느님 그 자체로 인정하는 삼위일체론의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점까지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모두 담은 고백이기 때문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한 문장만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했을 정도다. 토마스는 성경상으로는 예수에게 육성으로 직접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유일한 사도인데, 베드로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사도들의 리더[15] 자리를 받았음을 생각해 보면 토마스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어쩌면 신앙을 위해서는 토마스 사도의 불신이 믿는 제자들의 신앙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할 것"이라고까지 평했을 정도다. # 한편 이 신앙고백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신격화하며 붙여진 칭호인 '주님이요 우리 하느님(Dominus et Deus noster)'에 대한 반발이라는 견해도 있다.

토마스의 일화는 과학주의나 경험주의, 나아가 이성을 숭상하는 리얼리즘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토마스는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재판관, 측량사 등 공정함과 관련된 직업의 수호성인이다. 중앙일보 기자 문소영은 자신의 칼럼에서 어린 시절에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라며 토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했는데 칼럼의 요지는 난무하는 가짜 뉴스를 두고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만 골라 믿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스도는 토마를 많이 아꼈습니다. 왜 그를 위해 일부러 다시 나타났겠어요? 성경의 다른 구절을 보면, 토마는 예수께 충실했고 그러면서 탐구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말씀이 이해 안 갈 때 다른 제자들이 대충 가만히 있어도 토마는 꼭 질문을 했어요. 맹신하는 것보다 토마처럼 의심하고 질문하는 게 오히려 좋은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게 과하면 본인이 피곤하고 괴롭지요. 그래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

2.3. 순교

가톨릭에서는 서기 52년 인도에서도 남쪽 끝 부분인 케랄라 주에까지 가서 크리스트교를 전파하다가 순교했다는 전승이 있다.[16] 인도의 케랄라 지방은 고대부터 홍해와 교역이 활발한 지역이었고 이 때문에 현대 인도 가톨릭교회는 라틴 전례 교회와 더불어 대부분의 교구가 케랄라 주에 있으며 토마스 사도에 기원을 둔 시로말라바르 전례 시로말란카라 전례를 치르는 두 동방전례 교회도 함께 모여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 두 동방전례 교회는 이름 앞머리의 '시로'에서 알 수 있듯이 크게 보아 동시리아 전례에 속한다.

파일:external/www.talentshare.org/image017.jpg

인도 첸나이에는 '토마스의 언덕'이라고 하여 첸나이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토마스가 순교한 장소인 동시에 그의 무덤이 안장된 성 토마스 대성당이 있다. 이교도 제사장을 격노케 하여 인도 코르만델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1956년 3월 16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준대성전(Minor Basilica)급으로 승격되었다. 외경인 토마스 행전에 의하면 인도에서 예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예로 팔렸다고 한다. 유명한 토마스 복음서[17]와는 다른 책이다.

3. 기타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을 때 토마스가 동방의 사도이기에 그 이름으로 세례명을 정했다. 참고로 조선의 2번째 신부 최양업 신부의 세례명도 토마스이다.

그의 이름은 여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서구권의 흔한 이름으로 쓰인다. 중세 가톨릭 신앙을 '이성'과 논리를 통한 합리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사도 토마스에게서 이름을 따 왔다. 국명에도 들어가는데 상투메 프린시페의 상투메가 São Tomé, 즉 성 토마스라는 뜻이다.


[1] 후술될 전승을 따를 경우 52세. [2] 현재 인도 타밀나두의 밀라포어 지방에 위치한 작은 산이다. [3] 말년에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는 전승에서 유래했다. 성 토마스 십자가 하단에도 연꽃 장식이 있다. [4] 창에 찔려 순교한 사도 토마스를 기리는 의미다. [5] 그의 직업이었던 건축가를 상징하는 기물이다. [6] 사도 토마스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예수의 몸에 직접 손가락을 대어 예수를 확인한 것에서 유래. [7] 그레고리력 서기 72년 12월 19일. [8] 예수가 자력으로 승천한 것과 다르다. 자세한 것은 성모승천 문서 참조. [9] 공동번역 이전에는 천주교에서도 도마라고 불렀다. 안중근 의사의 세례명인 사도 토마스를 따서 '도마 안중근'이라고 부르는 식. [10] 이에 예수는 "낮이 12시간이나 있지 않느냐? 낮에 다닐 동안에는 빛이 있으니 사람들이 실족되지 않지만 밤에는 빛이 없으니 사람들이 실족한다."라고 대답한다. [11] 예수가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이제 깨우러간다."라고하자 "잠들었으면 낫겠군요."란 제자들에 대한 반응. [12] 개역개정판에서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13] 요한 복음서 20장 27 - 29. [14] 예수의 이미지라든가 운명상 움직이게 되는 입장상 유다의 배반은 유다의 책임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놓고 보면 저주와 분노보다는 탄식이 오히려 더 어울린다. [15] 가톨릭 정교회의 해석에 의하면 교황. 다만 정교회에서는 교황이 총대주교들 중 으뜸임은 인정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지 교황에게 교회의 수위권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16] 참고로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까지 갔다는 설도 있으며 당시 신라에도 다녀갔다는 말이 있다. [17]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예수 어록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