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사고 요약도 | |
발생일 | 1998년 9월 29일 |
발생 위치 | 말라카 해협 |
탑승인원 | 14명 |
실종자 | 14명 |
1. 개요
1998년 9월 29일 선원 14명과 알루미늄괴 3천여t을 실은 파나마 선적 화물선 텐유호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출발해 인천항으로 향하던 중 말라카 해협에서 실종된 사건.사건 발생으로부터 약 3개월 뒤인 12월 17일 중국 장쑤성 장자강시에 입항한 온두라스 선적의 '산에이-1'호가 텐유호와 동일한 화물선으로 밝혀지면서 선박 자체는 발견되었으나 실종 당시 텐유호에 승선하고 있던 14명[1]은 끝내 발견되지 못하였다.
텐유호가 행방불명됐던 원인으로는 선상 반란 등 여러 가설이 제시됐으나 결과적으로는 해적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텐유호를 납치한 해적과 한국인 이동걸과의 연관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지만 이씨는 핵심적인 혐의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으며 해외 해상에서 발생한 사건임에도 공조 수사가 부실하여 이씨는 장물 취득 및 증거인멸교사 등 혐의가 입증된 죄에 한하여 징역 3년을 선고받는 것에 그쳤다.
2. 사건 일지
2.1. 출항과 실종
1998년 9월 27일 오후 10시 20분 텐유호는 선원 14명과 알루미늄괴 3천 6백t을 실은 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쿠알라항에서 출발하였다. 배에 실린 알루미늄괴는 대한민국 조달청에 납품되기 위한 것으로, 그 가치는 1998년 당시 시세로 약 36억 원이었다.텐유호는 9월 28일 0시 20분 경 선주인 일본 마쓰모토기선에 출항 보고를 하였고 오전 1시 30분 즈음까지도 정상적으로 선주와 교신하였지만 원래라면 28일 정오에 송신되어야 할 정오보고(noon report)가 누락되었으며 새벽의 마지막 교신 이후 29일 0시가 될 때까지 교신 불능 상태가 지속되었다. 상황이 이상함을 느낀 마쓰모토기선의 모기업 텐유 해운 측은 일본 해상보안청에 행방불명 신고를 했고 해적행위를 의심한 해상보안청은[2] 쿠알라룸푸르의 해적신고센터(PRC)를 통하여 동남아시아 주요 국가들에 선박 수배를 요청하였다.
결국 한중일 3국과 주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전부 나서서 텐유호를 수색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텐유호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원래 목적지 인천항에 입항하기로 예정돼 있던 10월 8일이 지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사건은 이렇게 미궁으로 빠지는 듯했다.
2.2. 텐유호의 발견
1998년 12월 16일 중국 장쑤성 장자강시에 온두라스 선적의 '산에이-1'호가 입항하였는데 인도네시아 선원 16명이 승선한 상태였으며 화물로 팜유 3천t[3]을 싣고 있었다.중국 교통부는 이 배가 실종된 텐유호와 지나치게 유사한 것을 근거로 공안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 산에이-1호는 엔진번호가 텐유호와 동일한 데다 배 이름이 적힌 곳에 페인트가 덧칠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결론적으로 공안은 산에이-1호와 텐유호는 같은 선박임이 확인되었고 중국 공안당국은 즉시 해당 선박을 억류하여 수사를 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 선원 16명에 대한 수사가 수 달간 심층적으로 이뤄졌으나 중국 정부가 한동안 국제공조수사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수사 내용은 비밀로 부쳐졌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선원들은 1998년 12월에 인도네시아 두마이항을 출발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기록에 없는 일이었다. 공안당국은 이러한 사실에 집중하여 수사를 지속했고 마침내 산에이-1호의 등록번호부터 가짜이며 발급기관도 유령 기관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중국 측은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이 사건이 해적에 의해 일어났다는 결론을 내리고 발표했으나 알루미늄 3천 6백 톤이 팜유 3천 톤으로 바뀌어 있었던 경위나 상세 수사 사항 등에 대해서는 일제히 함구했다.
2.3. 한국인 개입 정황
해양경찰청은 사건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싱가포르의 한인 무역상인 이동걸이 텐유호에 실려 있던 알루미늄 3천6백t을 1998년 10월 초에 미얀마에서 중국 회사에 처분했다는 제보를 받았고 이씨를 포함한 한국인 관련자 3명을 구속하였다.선장 출신인 이씨는 싱가포르 무역회사 '다야테크놀로지'의 사장 자리에 있으면서 회사 소유주 베니 반(Benny Ban)과 공모하여 텐유호의 알루미늄을 취득해 처분하였으며 이 대가로 자신의 은행계좌에 거액을 송금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텐유호는 미얀마,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을 오가며 4회에 걸쳐 선적을 세탁하였는데 이 과정에 깊게 관여하면서 선박 소유권을 취득한 것도 이씨로 드러났다.
인천지방검찰청이 해경에서 수사기록을 넘겨받아 이씨의 혐의를 집중 추궁하였으나 이씨는 처음에 명의 도용을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수사를 개시한 시점에 이씨가 싱가포르에서 부산의 직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텐유호의 도면 사본 13장을 소각하도록 지시했음이 밝혀졌고 이씨는 이후 장물 취득 등 일부 혐의를 인정하였다.
2000년에 해경이 제작한 이 사건의 추정결론에 따르면 베니 반은 광둥성 소재 무역업체 '콘스탄트'의 대표 류훙꺼와 알루미늄 거래를 약속하였고 이를 위해 이동걸과 베니 반은 해적 조직과 연결돼 있는 '로저', '지미 코'(Jimmy Ko)와 접촉하였다.
이들은 정당한 거래로 위장한 무역 서류를 다수 작성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하였고 마침내 텐유호가 출항한 9월 28일 로저 및 지미 코와 연결된 무장 해적 조직이 텐유호를 습격하여 강탈하였다.
로저 등은 이를 베니 반과 이씨에게 통보한 후 양곤으로 뱃머리를 돌렸으며 그 과정에서 배 이름도 '비토리아'로 변조되었다. 배에 실려 있던 알루미늄괴는 사가잉(SAGAING)호에 이적되었고 해적 13명은 위조 여권을 통해 인도네시아로 출국하였다.
이후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여러 항구를 드나들며 수 차례의 선적 세탁을 하다가 장자강시에서 중국 공안당국에 덜미가 잡혔다는 것이 추정결론의 내용이다.
다만 가장 핵심적인 해적 행위에 관한 부분에 구체적인 물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결론에 따라 기소 및 재판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이동걸은 텐유호의 실종 경위나 선원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단지 베니 반이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라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추가적인 정보도 더 이상 나오지 않음에 따라 수사는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이씨는 핵심적인 혐의와 관계없는 장물 취득과 증거인멸교사, 외국환 거래법 위반의 혐의로만 기소되어 1·2심 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이 그의 상고를 기각함에 따라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3. 부실 수사 논란
'이동걸'이라는 핵심 가담자에 대한 의혹이 짙음에도 정작 사건의 본질인 해적 및 선박 탈취에 대해 기소조차 하지 못한 것에 관하여 당시 부실 수사 논란이 크게 일었다.해경과 검찰 측은 이러한 부실 수사의 배경에는 공조 수사의 미흡, 즉 당사국인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중국 측에서 항구에 입항한 산에이-1호에 승선해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해경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이에 해경이 사복 차림으로 선박에 접근해 탐문 수사를 시도하다가 중국 공안당국으로부터 간첩으로 오인받고 조사를 받은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