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18:04:23

타호프 전투

1. 개요2. 상세

1. 개요

후스 전쟁 시기인 1427년 8월 4일 보헤미아 왕국의 타호프에서 후스파 군대와 십자군이 맞붙은 전투. 후스파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주변 지역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2. 상세

1424년 10월 11일 후스 전쟁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던 후스파의 명장 얀 지슈카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지만, 후스파는 새 지휘관 야콥 프로코프의 지휘하에 여전히 강력한 면모를 과시했다. 그들은 1426년 6월 16일 아우시크 전투에서 십자군을 또다시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보헤미아 주변 지역을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자기들의 교리를 전파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갈수록 기세등등해지는 후스파를 어떻게든 무너뜨리기 위해 4차 십자군을 선포하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의 동생이자 윈체스터 주교이며, 곤트의 존의 아들인 헨리 보퍼트를 수장으로 세워 십자군을 모집하게 했다. 그러나 제1차 십자군과 제2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지기스문트는 후스파에게 거듭 패배한 뒤로 십자군을 재차 일으키는 것에 회의적이었고, 헝가리 왕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급급하느라 보헤미아엔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 대신 십자군의 사령관을 맡은 이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였다.

1427년 여름,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끄는 십자군 2만 5천 명이 보헤미아 남서부를 침공했다. 원정에는 트리어 대주교 지겐하인의 오토와 헨리 보퍼트도 함께 했다. 십자군은 후스파의 마을인 슈티브로(오늘날 마이스) 성채를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성채는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프리드리히 1세와 오토 대주교 간의 마찰이 생기면서 십자군의 사기는 점점 떨어졌다.

한편, 프로코프는 십자군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프라하에 병력을 집결시킨 뒤 그들을 격멸하기 위해 출진했다. 병력 규모는 보병 약 15,000명, 기병 1,500명, 바겐부르크(Wagenburg) 200대였다. 8월 1일, 후스파 군대가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한 십자군은 타호프 마을 북쪽 평원에 진을 치고 일전을 준비했다. 그들은 후스파 군대의 진격을 늦추고 전투 준비 시간을 벌기 위해, 8월 2일 란츠후트 공작 하인리히에게 기병 3천 명을 맡겨서 후스파 군대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후스파 군대를 공격하지도 않고 같은 날 저녁에 진영으로 복귀했다.

다음날, 십자군 내부에서 후스파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많은 십자군 장병들이 탈영했다. 8월 4일 후스파 군대가 타호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십자군 진지가 몇몇 경비대를 제외하고는 텅 비어있는걸 확인했다. 그들은 곧바로 진지로 들어가서 경비대를 제압하고, 성벽 뒤로 물러나서 버티던 플젠 지방의 보병대를 일주일간 포위한 끝에 항복을 받아냈다.

4차 십자군이 별다른 전투도 못해보고 허무하게 무너진 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헨리 보퍼트에게 다시 십자군을 모아서 후스파를 공격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헨리 보퍼트는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 이를 거부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후스파는 바이에른, 팔츠, 작센, 루지체, 슐레지엔, 모라바 등 주변의 여러 지역을 공격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고, 포교 활동 역시 활발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