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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가타나

타도에서 넘어옴
파일:우치가타나.jpg

1. 개요2. 특징3. 역사4. 타치와의 구분점5. 본 도검에 대한 오해와 진실6. 관련 문서

1. 개요

우치가타나([ruby(打刀, ruby=うちがたな)], 타도)는 일본도( 카타나)의 한 종류로, 현대에 가장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일본도 도검의 한 형태이다.

2. 특징

무로마치 막부 중기 이후부터 등장한 간단한 양식의 허리띠에 끼워서 차는 도검을 말한다. 정식 명칭은 '우치가타나(打刀, うちがたな)(타도)'이며, '카타나(刀, かたな)(도)'라는 말은 그냥 편하게 줄여서 부르는 약칭이다.

일본도에는 이러한 우치가타나 외에도 본 도검 등장 이전부터 쓰여 온 ' 타치(太刀, たち)(태도)'를 비롯한 여러 양식이 존재했지만, 그중에서도 현대에 와서는 이 도검이 일본도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하급 무사들이 도보전투에서 사용하기 위해 들고 다닌 수수하고 간략한 군용검에서 출발했으며, 이후 기존의 타치를 대신하여 실전도검의 지위를 차지하고 이윽고 무사의 계급과 권위를 상징하는 신분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현대에 흔히 카타나(刀)라 부르는 검이 이것을 뜻하지만 원래 '카타나(刀)'라고 불리던 칼은 이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본래 '카타나(刀)'라는 단어는 가마쿠라 시대에 쓰여진 여러 군키모노(軍記物)[1]에서 언급되는, 하급 무사들이 차고 다녔던 간단하고 단순한 외장을 지닌 짧은 칼을 의미했다. 이러한 짧은 칼은 정규 무장(武將)들의 정식 군용검인 ' 타치(太刀)'에 비해 한 단계 낮은 도검으로 취급되었으며, 그 인식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본래는 그렇게 쓰이던 단어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의미가 점차 확장되어, 마찬가지로 하급 무사들의 간략한 군용검에서 기원하고 있었던 도검인 '우치가타나(打刀)'를 줄여 부르는 약칭으로도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런 고로 혼동을 막기 위해, 이 문서에서는 무로마치 막부 중기 이후 등장한 양식의 일본도를 뜻하는 '우치가타나'를 '카타나'로 줄여 부르지 않고 정식 명칭인 '우치가타나'라고만 부르기로 한다.

3. 역사

무로마치 막부 중기까지는 이른바 남북조시대라 불리는 내전기간이었으며, 이때의 일본의 전투 양상은 갑옷의 중장화, 방어범위의 확대화, 그리고 이에 따른 무기의 거대화와 도보전의 확대가 주된 특징이었다. 이는 반정부 무장세력으로 출발하였던 악당(惡黨)세력이 각자 남조와 북조에 편입되어 전장이 산악을 비롯한 모든 지역으로 확대된 것에서 기인하며, 상체는 화살에 특화된 기마궁시용의 오오요로이(大鎧)의 양식이면서 하체는 도보에 편한 도마루(胴丸)의 쿠사즈리(草接)를 가진 갑옷도 있는 것 등이 이 시대를 그린 군키모노 등에서 그려진다.

이러한 전장환경에서 특히나 도보로 걸어다니는 하급무사들은 마상용인 타치는 불편하기도 했고 비싸기도 하였으므로 쓰기 편한, 짧은 날에 한손으로 쓰기 적당한 크기의 도검을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치가타나로 분류되는 최초의 양식이다. 이때의 칼날은 2척(60.6 cm) 정도로 짧으며, 슴베(나카고)도 짧아 한손으로 쓰기 좋은 형태였다.

우치가타나의 확산은 무로마치 후기, 오닌의 난과 함께 격화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쟁의 중심은 역시 뛰어난 실력의 중무장 기마무자들의 격돌이었지만, 오닌의 난이 장기화되면서 비싸고 양성이 어려운 기마무자들의 숫자가 급감하기 시작하고, 오랜 난으로 국토가 피폐화되면서 기마무자들의 양성이 힘들어진 환경 아래에서 새롭게 대두된 것이 바로 아시가루(足軽) 징집 체제였다. 아시가루는 군역의무를 진 농민들을 징집하여 구성하는 군대로서 전쟁이 기마무자 중심에서 도보전 중심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아시가루 징집 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도보에서 편하고 별도의 패용 장치 없이도 허리춤에 끼워 소지할 수 있는 우치가타나는 많이 확산되게 되며 칼날도 점차 길어지기 시작하고 점차 과거의 타치와 비슷한 길이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철포의 도입으로 중무장의 엘리트 무사들이 전쟁터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보이던 시대가 사라지고 진정한 의미의 근세 군대로 거듭나기 시작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2]에 이르면 무사의 정규 도검의 지위조차 타치에서 우치가타나로 옯겨졌으며, 이 시대에 들어서는 과거 타치의 패용 장치를 제거하고, 허리춤에 끼울 수 있도록 쿠리카타(栗形)와 같은 부속품을 칼집에 장착하여 타치인데 우치가타나처럼 허리에 끼우는 한다치(반태도: 半太刀)가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전술의 변화와 더불어 정규 도검에 대한 인식까지 바뀌어가는 세태를 반영하게 된다. 이 때에 짧은 칼인 와키자시를 함께 착용하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하며, 우치가타나와 와키자시의 외장을 통일하여 한 셋트로 한 것을 다이쇼 코시라에(大小存え)[3]라고 불렀다.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 이후 우치가타나는 실전 무기를 뛰어넘어 무사의 계급과 권위를 상징하는 신분의 상징으로서 그 날길이도 규제되는데, 대도의 날 길이를 2척 3촌(69 cm)로 제한하고 평민은 와키자시만을 호신용으로 허가하는 등 무기 규제에 나섰다.[4] 이때에 무사의 정장으로서 우치가타나와 와키자시를 함께 패용한 다이소 코시라에가 복장규정으로 제정되며, 우리가 아는 일본도 패용 모습이라는 게 보통 이 다이소 코시라에를 완비한 에도시대 무사들의 정장 모습이다. 이때는 실전 도검으로써의 수요보다는 신분의 상징이었으므로 무사의 공무원화가 극에 달했던 에도시대 중기쯤에는 타케미츠라 하여 칼날을 대나무로 만든 물건이 등장하기도 했다.[5] 막부 말의 혼란기에는 일시적으로 우치가타나가 실전 도검으로써 부활하지만, 내전에서부터 잡품 취급을 받고[6] 유신 이후 폐도령이 내려진 이후는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었다.

1877년 벌어진 서남전쟁에서 발도 돌격으로 전쟁터에서 나름대로의 유용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 증명했지만, 결국 사츠마 군이 패배했고 유럽식 군대를 지향하던 당시의 일본군의 정서 때문에 도로 찬밥신세가 된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으로 이른바 실전군도라는 개념이 일본군도에 도입되는 계기를 만들기는 한다. 이후 일본육해군에서는 제식군도를 지휘도라고 칭하고, 우치가타나와 타치의 칼날을 사용하고 손잡이를 늘려서 일본도처럼 사용하게 만든 물건들을 실전군도라고 호칭한다. 양손세이버라는 장르의 출현이었다. 일본도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것은 1934년 일본도 형태를 한 신군도의 제정과 함께였으나, 우치가타나가 아닌 타치였다. 우치가타나는 1943년 3식 군도의 제정에 이르러 부활하게 되지만, 제정 2년 후 패전과 함께 폐지를 당하고, 전후 <무기>가 아닌 <전통 공예품>으로써 현대에 이르고 있다.

현대에는 일본도의 대명사로써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일본문화에 대한 환상과 함께 그 아이콘으로써 우치가타나가 전면에 내세워진 것. 원조라 할 만한 타치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으나 우치가타나는 모두가 다 알고 있다.[7] 인기도 많고 인지도도 압도적인지라, 근대를 거치며 소멸해간 수많은 도검 중 어떤 면에서는 가장 성공한 도검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성공적인 장점은 가토리신토류(香取神道流) 등의 고류를 통하여 사용법이 현재도 남아있다는 것. 현대의 장검 중에 Man to Man에 의한 기술 전수가 이루어지는 장검은 우치가타나가 거의 유일하다. 기술도 단일화 된 형태가아니라 여러 유파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수 되고 있다. 서양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장검술이 대개 서적을 통한 복원 과정을 거쳐서 전수된다는 점에 비교해 볼 때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부분이다.

4. 타치와의 구분점

도검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 대중 매체에서는 흔히 타치보다 직선적이면서 좀 더 짧은 수수한 도검으로 묘사되지만 타치냐 우치가타나인가의 구분은 칼날의 구분과 외장의 구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 타치의 칼날을 외장만 바꾸어 우치가타나로 차고 다닌 경우도 제법 있기 때문에, 이 도검이 태생이 무엇이었는가는 칼날을 보아야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패용했을때 몸의 바깥쪽에 해당하는 왼쪽면에 장인의 이름이 새겨지는데, 타치는 칼날을 아래로 했을 때, 우치가타나는 칼날을 위로 했을 때 장인의 이름이 나오게 된다. 물론 장인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무메이(無名) 칼날의 경우는 이러한 구분이 불가능하고, 이럴 경우 전문적인 감정가의 분석을 통해서 구분할 수 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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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장으로는 구분이 쉬운 편이다. 타치는 우선 칼집부터가 금속부품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2개의 패용장치(아시카나모노: 足金物)를 통해 바로 구분할 수 있다. 칼집 끝과 입구를 보강하는 코지리(小尻)와 구치가네(口金)이 붙어있고, 칼집 중간에는 칼집 중간을 보강하는 금속 링인 세메가네가 있다. 일단 척 봐서 금속부품이 많은 것이 특징. 패용장치가 없고 우치가타나 칼집처럼 쿠리카타(栗形)가 붙어 있어도 타치 칼집 특유의 장식들은 그대로이며, 이런 경우 한다치(半太刀)의 칼집인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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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 우치가타나의 칼집은 이러한 금속 장식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단색으로 색칠을 한다. 물론 에도시대에 들어서 화려하게 색칠하고 꾸미지만, 금속 부품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적다는 것과, 패용 장치의 유무로 단숨에 구분이 된다. 코지리와 구치가네를 금속으로 쓰는 경우도 있으나 타치에 비해 훨씬 작고 수수한 것으로 구분 가능. 대부분은 물소뿔을 사용하여 칼집 입구와 끝을 보강하며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도 잘 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타치가 정규 무장의 과시성 강한 기병도였다면, 우치가타나는 도보병이 사용한 수수한 도검이었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칼자루에서도 큰 차이가 나는데, 타치의 경우 손잡이 끝에는 크고 화려한 가부토가네(胄金)를 사용하고, 쯔바(鍔)의 경우 코가이 & 코즈카를 통과시키는 구멍이 없으며[9] 셋빠(切羽)[10]도 장식을 위해 여러 장씩 끼우는 경우도 많다.

우치가타나는 코가이 & 코즈카 구멍이 쯔바에 존재하고, 크고 화려한 가부토가네가 아니라 일종의 뚜껑처럼 칼자루 끝을 덮는 카시라(頭)를 사용한다. 셋빠도 앞뒤 한장씩만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 타치와 비교하면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영향을 받아서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타치는 쯔바에 구멍이 있는 것도 존재한다.

칼집에 묶이는 끈은 사게오(下げ緒)라고 하며, 원래는 타치의 패용장치의 가죽과 연결되어 풀어서 허리띠처럼 묶는 방식으로 장착하던 일종의 소드벨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치가타나에는 패용 장치가 없어서 원래의 역할은 하지 못하나, 관례상 묶어놓고 있다. 이 사게오의 역할에 대해 국내에서는 칼을 차고 풀어 허리띠에 묶는다던가, 혹은 일본옷의 소매를 정리하기 위해 묶는 것 등을 이유로 들지만, 사실은 우치가타나에서는 그냥 다용도 끈에 지나지 않으며, 어디에 쓰던 자기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11] 독특한 묶기법들이 존재하여 보기에 매우 멋이 있는데, 원래는 필요시 언제라도 쓰기 위해 빨리 풀기 위한 요령이었지만 점차 그 묶인 모양새에 신경을 쓰면서 실용성보다는 외관에 더욱 치중하게 된 경향이 있다.

5. 본 도검에 대한 오해와 진실

우치가타나가 마상용 검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우치가타나는 위에 언급되었듯 그 근본부터가 도보무사의 지상전용 도검이다. 아무래도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쪽의 곡도나 서양의 마상용 세이버의 경우만 생각해 '휘어진 칼 = 마상용'이란 공식을 적용한 오류인 듯. 참고로 우치가타나 이전의 도검 양식인 타치의 경우 기마용 도검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시대에 따라 양식의 변화가 심해 마상용 도검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기마무사가 주력이었던 시대 일부에 한정되는 이야기이다.

우치가타나가 타치보다 짧은 도검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단 타치의 경우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무기들이 점차 중후장대화되는 경향에 따라 오오타치 같은 크고 아름다운 유물들이 많지만, 우치가타나가 많이 사용된 에도 시대의 경우 칼날의 길이를 제한하는 규정이 있어 긴 것이 많지 않기 때문. 일단 타치의 평균적인 날 길이가 70~80cm 가량인데, 우치가타나는 날길이 69cm에 하바키를 더한 칼날부위의 전체길이가 72cm 정도로 타치랑 비슷하거나 약간 짧은 정도이긴 하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다. 애초에 우치가타나 중에서도 소장만 하던 유물이나, 길이 제한이 없었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우치가타나의 경우처럼 얼마든지 긴 것들이 있다.[12]

국내의 검술 단체 중에 전통 검도를 한다는 곳치고 이 우치가타나를 쓰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려운데, 조선시대에는 우치가타나와 같은 구조의 패용을 하는 도검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대부분 패용 장치 2개와 띠돈을 사용해 벨트에 착용하여 평소에는 칼자루를 후방으로 돌려놓고 발도시에는 앞으로 돌려 뽑는 식이었으니, 이런 우치가타나를 쓰는 '전통' 단체를 보면 일단 사기라고 생각해도 좋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환도는 일본의 우치가타나에 맞서기 위해 대형화가 진행되었던 임진왜란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일관되게 우치가타나보다 짧고 가벼웠음이 기록으로 잘 드러난다. 마상전투를 하지 않는 일반적인 조선군의 주 무장은 어디까지나 창과 이였고, 검은 그 자체로 지휘봉이나 신분을 상징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거나 근접전투용 부무장으로서의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 조선군의 무장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활을 쏘는데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칼 자체를 휴대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을 정도.[13] 근본적으로 체급이 다른 검을 가지고 검술을 하는데 전통을 살린다기엔 틀린 움직임이 많을 수밖에 없으며, 무협지도 아닌 현실에서 실전형 검술을 만든다고 해봐야 우치가타나 체급의 도검을 가지고 하는 검술은 결국 조선시대의 검법이 아니라 일본의 검도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옷만 한국 사극식으로 입고 실제로는 우치가타나를 들고 일본 검도의 움직임을 하는 사이비 전통무술단체들이 꽤 있었다.

6. 관련 문서


[1] 일본의 독특한 전쟁이야기 기록. 소설과 역사서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들도 많지만 대부분 실제 역사와 인물을 바탕으로 이야기 형식의 역사 서술을 하는 논픽션 스토리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전쟁문화나 군사발달, 역사연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종류. [2]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한 1568년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설립되는 1603년에 이르는 기간. 소규모의 영주가 난립하던 시대가 끝나고 이른바 천하인(天下人)이라 불리는 일본을 통치하는 권력자가 등장했으며,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군사적 잔재가 사라진 시대이기도 하다. [3] 코시라에란 도검의 외장(外裝)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칼날을 제외한 칼집, 손잡이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디자인을 코시라에라고 한다. 혹은 도장구(刀裝具)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외장부품 그 자체를 지칭하는 의미. [4] 물론 조금이라도 긴 것이 칼싸움에 유리하고, 큰 무기를 갖고 싶은 평민들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날길이 규정인 2척(60.6 cm)에 아슬아슬하게 근접하는 1척 9촌 9분(59.9 cm 정도)의 날길이를 가진 것을 쓰기도 했다. 이런 걸 오와키자시라고 부르며, 여행자, 상인, 야쿠자 등이 주로 소지했다고 한다. [5] 칼의 무게가 귀찮은 무사들이 칼날을 빼버리고 가볍게 끼우고 다니려는 생각에서 등장한 것. 그러나 실제로는 가난한 무사들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칼날을 팔아 생활비에 충당한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에도시대에 무사들이 결투를 벌이면 양쪽 다 처벌하였으며, 해고나 할복 등 처벌이 무거웠고, 성내에서는 칼만 뽑아도 처벌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칼부림 같은 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더불어 당시 무사들의 급료는 결코 많지 않았고, 고위 무사라도 가신단을 편성하는 것이 의무였기 때문에 유지비가 많이 들어 빠듯하기는 마찬가지였을 정도인지라 하위 무사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경우는 일상이었다. [6] 죠슈번군은 영국식, 막부군은 프랑스식 보병조전을 개시하여 알려진 바와는 달리 양측 모두 최신예 유럽식 군비를 갖추고 있었다. 막부군의 경우 당연히 장교는 우치가타나와 와키자시를 함께 패용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죠슈 측의 저격수가 우치가타나와 문장이 새겨진 철모를 보고 족족 저격해버리는 바람에 결국 막부 장교들은 우치가타나를 빼고 병사들처럼 와키자시만 패용하게 됐다. 그리고 우치가타나도 별로 쓸데도 없어서, 날길이가 비교적 짧은 돗페이(突兵) 코시라에가 이 시대에 제법 쓰였다. [7] 물론 일본도에 관심이 없으면 타치와 우치가타나를 구분 못한다. [8] 하몬의 종류, 칼날의 세부적인 디테일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어느 정도의 구분이 가능하지만, 불가능한 경우도 없지는 않다. [9] 코가이는 귀후비개와 스틱이 일체화된 것이고, 코즈카는 작은 칼날을 가진 것으로 커터칼 같은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일상도구로써, 우치가타나를 일상적으로 패용하는 에도시대 무사들이 끼우고 다니던 것이다. 둘 다 칼집에 별도로 판 구멍에 수납되고, 쯔바의 두 구멍 사이로 머리가 빼꼼히 나온다. 즉 에도 시대의 특징이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에 제조된 타치들은 이런 게 없다. [10] 칼자루 앞쪽을 보강하는 후치와 쯔바 사이에 끼우는 일종의 와샤 같은 것. 칼자루의 밀어주는 힘을 셋빠를 통해 쯔바에 넓게 분산시켜 고정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현대의 공업에서 쓰이는 와셔(Washer)와 같은 역할을 한다. [11] 현대 나이프에서 유행하는 파라코드 매듭과 다를 바가 없다. [12] 애초에 저 칼날 길이 제한 규정 자체가 칼싸움에 유리하다고 칼날을 자꾸 늘리려 드니까 무력 제한 차원에서 한 일에 가깝다. [13] 참고로 전통무술을 살리는데 실질적인 한계가 조선시대까지다. 그 이전인 고려시대만 해도 기록을 찾는게 상당히 애를 먹는 판인데 그보다 훨씬 이전시대인 고구려나 발해는 무술의 상세 내용은 커녕 해당 국가의 역사기록을 발굴하는것 자체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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