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음반 회사에 대한 내용은 킹 레코드(일본)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2. 상세
설립자 박성배는 1960년대에 청계천에서 팝송 빽판(해적판)[1] 음반을 팔아서 번 돈으로 킹 레코드를 세웠고, 그 이후 재능있는 가수들을 알아보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킹박으로 불렸다. 당시 박성배가 발굴해서 데뷔시킨 가수들이 바로 신중현, 양희은, 송창식, 조용필, 이문세 등등. 김추자와 펄시스터즈 등 70년대 신중현 사단도 전부 박성배의 작품이었다. 그야말로 70~80년대 가요계를 좌지우지했던 인물.하지만 동시에 박성배는 음반판매로 엄청난 돈을 벌면서도 정작 가수들한테는 한푼도 주지 않는걸로 악명을 떨쳤다. 제대로 된 계약서 같은 것은 당연히 없고 모든게 주먹구구식이던 당시 열악한 연예계 현실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수들을 옭아매서 "내 돈으로 음반제작했으니 수익은 전부 내꺼, 넌 밤무대 뛰면서 알아서 먹고 살아라" 식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박성배는 가수들이 계속 돈달라고 개기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시간 끌다가 갑작스레 회사를 폐업하고 미국으로 도망가곤 했다. 그리고 잠잠해지면 다시 귀국해서 또 다른 신인을 발굴해서 대박 터트리고, 또 시끄러워지면 잠적. 이 짓거리를 계속 반복했다.
결국 1990년대 초반 무리한 확장으로 인해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부도와 함께 참혹하게 몰락했다. 부도 다음날 아내가 충격을 받아 죽었고, 미국에서 살던 아들도 모친의 장례를 위해 귀국하다 병역법 때문에 출국을 못하여 방위병 복무 도중 탈영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미주중앙일보 기사).
그렇지만 킹박시절의 악명에 치를 떨었던 가요계 인사들은 회사 부도 이후에 비참한 상황에 빠진 박성배 회장을 모두 외면했다.[2] 그 이후 소식이 없다가 2008년 미국에서 노숙자로 지내다가 쓰러져 혼수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이 미주한국일보 등 재미동포 언론을 통해 전해졌고, 같은 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투병 당시에 혈육이라고는 독일에서 사는 외동딸밖에 없었다. 양희은의 증언에 따르면 이 딸이 나중에 연락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아버지 대신 사과했다고 한다.
어떻게보면 박성배 회장은 조용필, 신중현, 양희은, 송창식, 이문세 등등 대한민국의 대중음악계를 좌지우지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을 발굴한 거물인 동시에 주먹구구식이었던 옛날 한국 연예계의 악습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012년에 신중현은 킹레코드 시절 음반 판권을 소유한 예전미디어를 상대로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에 저작권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 1심에서 승소를 받았지만( 2012가합37), 2013년 서울고등법원 민사4부 항소심에서 패소하자( 2012나50836) 대법원 상고심까지 갔다가 2016년 최종적으로 패소 판결을 받았다.( 2013다56167)
현 신나라뮤직[3]의 전신인 동명의 회사와는 무관하며, 그쪽은 1992년에 세워진 다른 회사다. 1998년에 전술한 동명의 일본 음반사와 상표권 갈등이 터져서 변경했다.
[1]
1970년대까지는 해외 음반이나 소설을 돈주고 사온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해외발매 음반이 정식수입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대부분은 국내에서 무단복제해서 음질도 조악한 해적판으로 음악을 들었다.
[2]
다만 미주중앙일보 보도 후
이장희와 안경희, 이상열 등 일부 가수들이
지원 의사를 밝혔다.
[3]
아가동산계 기업 미디어신나라(신나라레코드)의 관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