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크산테는 고향의 역사에 푹 빠져 자랐다. 저녁 시간이 되면 아버지가 힘과 용기로 초월체의 폭압에 저항한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나주마를 세운 선조들이 슈리마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쓰러뜨린 무시무시한 짐승들에 대해 얘기했다. 결국 선조들은 거센 폭포, 나무가 무성한 절벽, 풍부한 동식물 등 매우 희귀한 사막의 보물로 가득한 곳을 발견했다. 오만한 초월체의 손아귀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자유 공화국 나주마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크산테는 단어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기며 이야기 속 영웅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전사가 되어 후세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나주마 최강의 전사 사냥꾼이 되리라 다짐했다. 크산테는 20년 동안 여러 스승 밑에서 무술을 익혔다. 하지만 나주마의 적을 존중하라고 가르친 것은 크산테의 부모님이었다. 나주마의 적은 바로 나주마의 자원을 탐내는 무자비한 포식자와 제국주의자 군주들이었다. 부모님은 나주마가 자유 공화국으로 남아 있으려면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무술을 익히며 나주마의 학자들과 함께 공부한 크산테는 강력한 표식에서 얻은 재료로 제작한 선진 무기와 기반 시설이 어떻게 고향을 5세기 동안 번영으로 이끌었는지 배웠다. 사냥을 다니던 초기에는 많은 이들과 우정을 쌓았지만 가장 가까웠던 친구는 매로우마크에서 온 토페라는 젊은이였다. 크산테가 근접전에서 맹렬히 공격하는 유형이라면 토페는 원거리 공격의 전문가였다. 두 사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호흡을 자랑하며 바위곰 무리, 샤칼 습격단, 심지어 제르사이 떼까지 물리쳤다. 손발이 척척 맞아 갈수록 유대감 역시 커져만 갔다. 별이 빛나는 어느 저녁, 크산테는 토페에게 동지애를 넘어선 자신의 감정을 고백했다.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스럽게 끌어안고 처음으로 입을 맞췄다. 별 밑에서 함께하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두 초월체, 황제 아지르와 마법사 제라스가 슈리마를 지배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켜 대륙을 파괴하며 무시무시한 괴생명체를 병력으로 동원했다. 머지않아 나주마 정찰대가 그러한 생명체 하나를 목격했다. 사자와 코브라처럼 생긴 거대한 포식자가 길을 잃고 돌아다니며 근처 초원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나주마 지도부가 그 야수를 진압할 수 있는 자를 찾자 크산테와 토페는 자신들이 물리치겠다고 맹세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야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힘으로 두 사람의 공격을 모두 막아 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어진 야수의 갑옷은 치명적이지 않은 일격을 받으면 금세 재생됐다. 결국 코브라-사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은 야수를 제압하지 못한 채 야수의 은신처에서 빈손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계속해서 시도했다. 크산테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나주마 최강이 되려면 이 야수를 반드시 죽여야 했다. 다른 것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크산테는 토페가 이해하리라 확신하며 해가 뜰 무렵부터 질 무렵까지 훈련에 매진했다. 한편 토페는 야수를 연구했다. 토페는 자신이 전략을 설명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연습용 모형을 공격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파트너의 모습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힘만으로 야수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 슬그머니 의문이 들었다. 두 사람이 거둔 가장 큰 성공은 한 전투에서 코브라-사자의 갑옷 조각을 손에 넣은 일이었다. 토페는 이 일을 진전으로 여기며 도움을 더 구하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산테는 분노했다. 이제 코브라-사자는 온전히 자신이 쓰러뜨려야 할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 야수를 처치하는 데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건 실패나 다름없었다. 자라면서 우러러봤던 영웅들은 절대 전투에서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니 크산테도 실패할 수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할 전투에서 도움을 받을 순 더더욱 없었다. 지금까지 토페의 제안대로 해 봤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둘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토페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크산테는 곧 토페의 전략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상처받은 토페는 무작정 훈련하는 것도 정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때 존경스러웠던 크산테의 투지는 어느새 이기적인 외골수의 고집으로 변해 있었다. 두 사람의 고통과 분노가 더해 갈수록 코브라-사자와 조우할 때마다 내분은 커져만 갔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은 점점 적어지더니 결국 침묵만이 자리하게 됐다. 그렇게 계속 엇갈리기만 하던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이듬해 내내 크산테는 고집스럽게 홀로 훈련을 이어 나갔다. 진전은 확실히 있었지만 승리로 이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크산테는 힘만으로 야수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크산테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크산테는 용기를 내 토페의 집을 찾아갔지만 토페는 매로우마크로 돌아간 후였다. 대신 크산테를 맞이한 사람은 토페의 이모였다. 크산테가 떠나려고 하자 토페의 일지를 건넨 그녀는 크산테가 일생일대의 적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되도록 조카가 남기고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산테는 토페의 일지를 샅샅이 읽었다. 서서히 두 사람이 저지른 실수의 패턴이 보였다. 코브라-사자에 관한 메모에 다다르자 크산테는 할 말을 잃었다. 토페는 그 야수가 실패한 초월체인 바카이라고 주장했다. 사악한 마법을 휘두르는 것으로 유명한 제라스가 초월 의식을 통해 슈리마의 동식물을 강제로 융합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 내용에 몰두한 크산테는 일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토페가 떠올린 바카이를 쓰러뜨리는 방법을 파악했다. 크산테 자신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아이디어가 많았다. 그날 저녁, 크산테는 좀 더 약한 괴물을 상대로 토페의 방법을 연습할 계획을 세웠다. 실력이 나아질수록 부모님의 가르침이 떠오르며 긍지를 넘어선 자만심이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산테는 토페의 생각을 진지하게 시험해 볼 정도로 존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의 파트너보다 적을 더 존중했다. 시간이 지나자 크산테는 자신의 단점을 받아들이고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토페와 함께한 것에 감사했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된 것 역시 감사했다. 진홍빛 하늘 아래에서 크산테는 다시 한번 코브라-사자에게 접근했다. 모든 움직임을 계산하며 야수가 공격하면 피하고 틈을 보이면 공격했다. 떠오르던 해가 어느새 가라앉고 있었다. 무기가 부서지고 몸이 붉게 물들었지만 정신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마침내 야수가 지친 기색을 보이자 크산테는 기회를 포착했다. 토페가 제시한 방법에서 영감을 받아 적을 나주마 폭포 쪽으로 몰았다. 폭포수에 젖은 코브라-사자의 갑옷이 약해지자 끝내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다. 지친 크산테는 당당히 섰다. 자신이 이룬 성과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여정이 자랑스러웠다. 나주마에 돌아온 크산테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전통에 따라 야수의 몸은 학자들에게 연구용으로 기부했다. 크산테는 야수의 갑옷을 두 조각만 떼어 자신이 쓰는 엔토포 무기를 개량하는 데 썼다. 갑옷의 재생력이 이식된 무기는 이제 두꺼운 바깥층이 부서지더라도 형태가 재생될 때까지 날카로운 날로 휘두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크산테는 토페가 일지에 그린 것을 각 엔토포에 새겨 넣었다. 바로 코브라-사자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함께하지 않았지만 크산테는 자신의 성공이 오로지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오늘날 크산테는 나주마의 긍지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크산테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려면 다시는 긍지로 판단력을 흐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월체의 위협이 드리우는 나주마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아지르나 제라스가 남쪽으로 진격해 온다면 크산테가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
2. 우리가 나눠야 했던 모든 이야기
크산테가 이마를 쓸자 피 묻은 손가락에 땀과 흙이 묻어나왔다. 그는 허리를 구부린 채 서서 상처를 입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주변의 열 명 남짓한 습격자들보다는 상태가 좋았다. 그들 옆에는 쓰러진 시체들이 슈리마의 열기에 익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크산테의 죽음을 원하는 초월체의 미친 추종자들이었다. 남은 광신도들이 검을 치켜세웠다. 칼날에 반짝이는 빛이 크산테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머리 위에서 태양이 자신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시 품고는 땅에 침을 뱉었다. 그는 선조들이 더욱 위대한 적들도 극복했던 대초원에서 죽기 위해 나주마의 긍지가 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기껏해야 정신 나간 마법사의 정복이라는 망상에 빠진 습격자에 불과했다. 광신도들은 고함을 지르며 돌진했고 그들의 발치에서 관목이 요동쳤다. 크산테는 놈들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전략은 없고 오직 피의 갈망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친 다리, 멍든 가슴, 입에서 느껴지는 피 맛에도 불구하고 공격에 대비했다. 금속과 금속이 충돌했다. 크산테의 엔토포가 치명적인 검날을 막았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광신도의 칼날을 밀어냈다. 엔토포의 무게는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크산테는 슈리마에서 가장 강력한 소재 중 하나인 코브라-사자 갑옷을 사용해 널찍한 직사각형 구조로 무기를 만들었다. 칼을 들고 은밀하게 접근한 광신도 하나가 크산테의 볼에 칼자국을 남겼다. 크산테는 고통에 신음하며 엔토포로 막고 있는 적을 밀어 무너뜨리고 엔토포를 원호로 휘둘러 칼자국을 남긴 광신도를 공격했다. 크산테는 웃었다. 이제는 어쩐지 계속해서 밀려드는 초월체의 광신도를 물리치는 것보다 바카이를 죽이는 것이 더욱 쉽게 느껴졌다. "불신자를 죽여라! 마법사께서 원하신다!" 크산테에겐 제라스에 대해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마법사의 추종자들에게 말해봤자 낭비일 것이다. 놈들은 곧 동료와 함께하며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지 못할 테니 제라스에게 직접 전달해 바카이 괴생명체를 죽인 것이 그라는 사실을 마법사에게 알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자칭 '신'이라는 마법사가 코브라-사자를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을 생각하면... 크산테는 혐오감에 속이 뒤틀렸다. 자기 민족과 문화는 바로 그의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마법사의 추종자들에겐 불행하게도 자부심이 크산테를 살아있게 만드는 연료였다. 적들이 공세를 이어나가자 크산테는 앞을 바라보며 무기를 더욱 굳게 쥐었다. 광신도들은 그에게 뛰어들면 사방에서 공격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거지? 넷 다섯, 여섯? 아마도 열기나 탈진 때문에 그의 시야가 일렁거렸다. 앞으로 나섰지만, 오른쪽 무릎이 휘청거렸다. 그는 엔토포를 사용해 자세를 바로잡고 위와 아래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막았다. 이제는 적들이 몰아치고 있다. 그가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림없지. 그는 포효를 내지르며 적들을 밀어내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공격을 되갚아주기도 전에 하늘에서 세 발의 화살이 떨어져 세 광신도의 목에 적중했다. 당황한 크산테는 적들이 비틀거리며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놈들을 쓰러트려라!" 누군가 공격을 명령했다. 크산테는 시선을 돌려 활을 들고 갑옷을 입고 있는 큰 전사가 화살을 장전하고 있는 다른 세 명의 궁수들을 이끄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들은 녹색과 금색이 조화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지도자의 얼굴은 장식된 가면 뒤에 숨겨져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나주마인. 우린 초월체의 아군이 아니야." 지도자가 말했다. 크산테는 죽은 광신도의 시체에 박힌 화살을 훑어봤다. "그런 것 같군." 지도자가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풍부했으며 어쩐지 익숙했다. 크산테는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마음이 놓였다. 크산테의 예상치 못한 동료들이 모이는 동안 광신도들은 다시 한번 돌진했다. "준비됐나?" 지도자가 물었다. "물론." 크산테가 엔토포를 내리쳤다. 전방의 땅이 갈라지는 충격으로 균열이 일어나 흙과 자갈이 솟구치며 가장 가까운 적을 밀어냈다. 엔토포의 외피가 갈라졌다. 노출된 중심부가 태양에 빛났고 두 개의 흑요석 칼날이 드러났다. 크산테가 손잡이를 거꾸로 쥐고 날카로운 칼날을 앞으로 내밀었다. 크산테는 자신의 무기가 방어막을 재생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크산테가 도약했다. 모든 힘을 긁어모아 탄력을 이용해 공중에서 몸을 회전했고 한쪽 다리를 뻗어 세 명의 적들에게 파괴적인 돌려차기를 날렸다. 적들은 큰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고 적들의 가슴을 향해 엔토포를 휘둘렀다. 광신도들은 비명을 질렀다. 크산테의 동료들이 포효했다. 크산테의 주변에 화살의 비가 내리며 측면을 노리던 광신도들을 막았다. "포로는 필요 없다!" 지도자가 선언했다. 크산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것인지 적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피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이를 악물고 미간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아가 칼을 휘둘렀다. 적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먼지가 가라앉고 마침내 광신도들은 먼저 쓰러진 동료들과 나란히 누워있었다. "끝났군." 지도자는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래, 일단은 말이지." 겨우 자세를 고쳐잡은 크산테의 얼굴과 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생기를 잃은 광신도들의 시체를 바라보는 동안 손에 들린 엔토포가 재생하기 시작했다. "하나도 안 변했군, 크산테." 지도자가 말했다. 크산테가 올려보았다. 가면을 손에 들고 웃는 얼굴이 보였다. 크산테가 토페에게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표정이었다. "분명 묻고 싶은 게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와 함께 가자." 멀리서 토페가 느긋하게 손짓했다. "야영지가 근처에 있어. 네 상태가 위중해 보이거든." 크산테는 긴장된 호흡을 억누를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없어도 휴식이라는 생각은 너무 매혹적이었다. 크산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 다가갔지만, 주변의 세상이 돌기 시작하자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나무 침대에 누워 부드러운 담요를 덮고 있던 크산테가 깨어났다. 녹색 가닥을 손가락으로 훑자 매로우마크 직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부드럽고 질긴 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천막이 머리 위 태양의 열기를 막아주었지만, 여전히 바깥에서 북적이는 야영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금속을 제련하고 강철에 망치를 내리치는 소리 덕분에 무기 생각이 났다. 재빨리 주변을 살펴본 크산테는 완벽하게 재생된 엔토포가 멀쩡한 상태로 침대 기둥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그는 토페의 오래된 그림을 바탕으로 검면을 따라 자신이 직접 새기고 칠한 코브라-사자를 살펴보았다. 토페가 알아챘을지 궁금했다. 만약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할까? 토페의 추측이 틀렸다면? 무엇보다 그건 몇 년 전의 일이다. 크산테는 기억하려고 했다. 정확히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지? "이틀 내내 새끼 아르마딜로처럼 쓰러져 있더군." 초록색과 금색의 매로우마크 튜닉을 입은 토페가 팔짱을 낀 채로 크산테의 천막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웃음을 본 크산테는 적당한 미소로 대했다. "오늘은 가면 안 써?" 크산테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내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광신도 일을 돕지 못하게 했을 거라는 사실은 우리 둘 다 알잖아." 크산테는 항변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다시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 최근 자신의 안하무인 격인 태도를 억누르려 했지만, 여전히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은 빠르게 퍼지지. 지난 몇 개월 동안 초월체의 병력이 남쪽 깊이 침입했어. 나는 놈들이 대초원 근처에 있을 거라 예상했지. 그리고 나주마에서 최고의 실력자를 보낼 거라고 예상했고. 내가 예상하지 못한 건 너였어. 너 혼자. 네가 스무 명이 넘는 놈들의 병사들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내가 놈들을 처리할 수 있다 생각했어." 크산테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무기 옆에 놓인 자신의 갑옷을 집어 들었고 갑옷을 입으며 신음했다. 토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물론 그랬겠지. 그리고 분명 그랬을 거야." 그가 고개를 저었다. "걸을 수 있다면 먹을 수도 있겠지. 점심이라도 먹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게 어때? 나주마의 긍지를 빈속으로 돌려보내면 안 되지." 크산테는 조심스럽게 토페를 따라 천막에서 나왔다. 앞에는 야영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전사들은 대련하고 활을 쏘고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토페의 구조단에서 본 얼굴들이 있었다. 근처에서 요리사가 다양한 주철 냄비를 휘젓고 있었다. 크산테는 냄비 중 하나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친숙한 카사바, 참마, 옥수수 가루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냄비에서는 밥 위에 토마토, 양파, 염소 고기, 피망이 올라가 있었다. 토페가 탁자로 한 쌍의 의자를 당겼다. 두 치수는 큰 갑옷을 입은 젊은 청년이 가득 찬 잔을 들고 다가왔다. "야자술?" 토페가 제안했다. 크산테는 구미가 당겼다. 고향에서 제일 좋아했던 술이지만, 거절했다. 이 대화가 어떻게 이어지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싶었다. "물로 부탁하지." 토페가 청년을 바라봤다. "들었지." 젊은 청년은 서둘러 떠났다. "그래서, 여기서는 널 뭐라고 부르지?" 크산테가 물었다. "대부분은 왕이나 군주라고 부르지." 토페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말했다. 크산테가 머뭇거렸다. 토페는 미소를 지으며 탁자를 내리쳤다. "농담이야! 그런 일을 겪고도 내가 미친 초월체처럼 대관식이라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이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상상도 가질 않는군." 크산테가 말했다. "오, 이모님이라면 나랑 절연하실 거야." 토페가 확신하며 말했다. "공개적으로. 우리 선조들께서 분노하지 않으시도록 말이야." 그는 이모님의 목소리로 설명했다. 크산테가 키득거렸다. "농담이 아니야. 네 부모님도 똑같이 하셨을 거야." 토페가 함께 웃었다. 청년이 음식 접시 두 개를 가지고 돌아오자 토페는 크산테와 자신의 잔에 물을 따랐다. 향신료로 밝은 주황색으로 물들고 피망이 올라간 쌀에서 퍼지는 강한 냄새에 크산테의 위장이 요동쳤다. "맛있게 먹어." 토페가 말했다. 크산테는 식사하며 토페와 주변의 야영지를 살펴봤다. 모두가 전쟁 중임에도 행복해 보였다. 전장의 이야기를 나누는 근처 사람들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뛰어다니며 여러 장소를 오가고 있었다. 바쁘고 분주한 분위기였지만, 토페가 음식과 음료를 더 부탁할 때마다 불평 없이 제공했다. "네가 해낸 것 같은데." 크산테가 바라봤다. 토페가 술을 홀짝였다. 그리고는 팔을 들어 야영지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래, 바보 무리를 이끌고 있지. 지금까지 아무도 날 끌어내리지 않았으니까. 믿어져?" "그러기엔 넌 너무 고집이 세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건가?" 두 남자가 웃었다. 크산테는 토페의 얼굴에서 세월과 몇 개의 흉터가 남긴 거친 흔적을 알아차렸다. 새롭게 생긴 건가? 아니면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크산테는 무언가를 찾았다. 분노, 슬픔, 고통? 그의 몸이 죄책감으로 굳었다. 그는 식사를 계속하며 야영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주한 소란이 대화의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사령관. 보통은 그렇게 부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말이야." "적어도 매로우마크의 긍지는 아니잖아." 크산테가 말했다. "하! 그 칭호는 언제나 나보다는 네게 더 잘 어울렸어. 네 이름을 기리는 행사가 있을 거라고 들었는데?" 크산테가 겸손하게 말했다. "음, 그래. 나주마에 있는 사냥꾼의 전당에서 말이야." 토페는 감명받은 것처럼 보였다. "바로 우리가 훈련받은 곳이잖아. 놀라운데! 네 어머님과 아버님도 가시나?" "내가 말릴 수 있어야지." "네가 애쓰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말이야." 크산테가 키득거렸다. "언제야?" 토페가 물었다. 크산테가 피망이 올라간 밥을 한술 더 떴다. "다음 달이야. 첫 주말." "오, 내 결혼식 즈음이군!" 토페가 활기차게 떠들었다. 크산테가 주저하며 단어를 골랐다. 그리고 재빨리 웃었다. "축하해!" "고맙군." 토페는 크산테의 당황을 눈치채지 못하고 미소로 화답했다. "우리 둘 다 서로에게 특별한 날을 놓칠 것 같은데." 크산테가 다시 키득거렸다. 많은 세월이 지나도 토페의 기지는 여전했다. 처음부터 토페에게 끌린 이유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교류에는 언제나 웃음이 있었다. 두 사람의 연애에서 세월에 변치 않는 순간들은 그들이 공유하는 즐거움이었다. 크산테는 그런 순간이 그리웠다. 하지만 헤어지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해 옳은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다. 마지막 코브라-사자 사냥이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젊었고 강했다. 그리고 어느 것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게 바로 긍지에 대한 재미있는 점이다. 가끔은 최고의 모습에서 최악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니까. 모든 일들 중에서도 크산테가 기대하지 못했던 일은 바로 앞에 있는 남자와 함께 앉아 즐기는 식사였다. 하지만 그는 준비되어 있었다. 오래전에 이런 순간이 오게 된다면 탓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과거는 과거였다. 이제 실제로 그가 더욱 관심을 두는 것은 현재와 미래였다. 크산테는 음식에서 시선을 올렸다. "둘은 어떻게 만났어?" "아, 재밌는 이야기지. 학교에서 만났어." "학교?" "그래." 토페는 답하고 잠시 멈추었다. "코브라-사자 사건 이후 매로우마크로 돌아갔지. 다시 학교로 갔어. 내가 항상 전투의 복잡성을 연구하길 좋아했던 거 알고 있잖아. 그래서 몇 년 동안 외지 문화로부터 전략을 익혔지. 녹서스, 데마시아, 그리고 프렐요드의 차갑고 슬픈 전사들." 크산테가 놀란 척했다. "그게 네가 사령관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나?" 그는 과하게 다문 치아 사이로 숨을 내쉬었다. "전쟁은 정말로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법이지." 토페가 히죽거렸다. "네가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우리 모두 먼 길을 왔어, 크산테. 우리는 두 명의 젊은 사냥꾼이었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했었지? 재능만 있고 규율이 없다고 했나?" 크산테가 끄덕였다. "이제는 적당한 재능에 적당한 규율이지... 가끔은." 토페가 큰 목소리로 자유분방하게 웃었다. 크산테는 받아들여진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주는 우렁찬 웃음소리의 온기를 떠올렸다. 크산테는 한숨을 쉬고 어깨의 긴장을 풀고 식사 중 처음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토페가 말을 시작했다. "있잖아, 내겐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없었어. 아마 당시에는 믿을 수 없어서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그러니 들어봐." 크산테는 토페가 말을 계속하기 전에 손톱을 뜯는 모습을 지켜봤다. "미안해." 마침내 토페가 자세를 고쳐잡으며 말했다. "당시에는 내가 널 돕지 않았지. 코브라-사자 전투에서 말이야. 적어도 네가 원한 방식은 아니었으니까. 그게 네게 무슨 의미인지 당시에는 몰랐—" "아니." 크산테가 끼어들었다. 그는 이 대화를 여러 차례 생각했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자신의 감정과 이유를 되풀이하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점차 교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자신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입힐 수 있었던 상처를 마침내 인정하게 만든 것이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자신의 자존심이 다른 이들을 몰아내고 전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적을 죽이는 일은 쉬웠다. 갈등을 해결하는 일은 그렇지 못했다. 요즘 크산테는 이런 대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런 순간을 생각하며 보낸 많은 시간 덕분에 다음에 할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니야." 크산테가 굳은 목소리로 다시 말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널 다치게 했잖아." 그가 숨을 내쉬었다. "그래, 코브라-사자는 끔찍했지. 그리고 맞아. 내가 나주마의 가장 위대한 전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걸 죽이는 게 가장 중요했었지. 하지만 너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할 필요는 없었어. 사실 난 너의 기록을 이용했어. 그게 바카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건 너잖아. 그 덕분에 우리가 시작했던 걸 끝낼 수 있었지. 그건 고마워." 크산테는 반쯤 먹어 치운 두 사람의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깊은 대화의 흔적이었다. 그의 눈이 토페의 눈과 마주쳤다. "나도 너의 더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었어. 그리고 그건 미안해. 진심이야." 그는 사막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는 동안 토페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해가 진 것이 분명하다. 해가 언제 떨어진 것인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숨을 돌리고 웃었다. "하지만 너도 내게 고마워해야 해." "뭐라고?" 토페가 밝게 말했다. 토페는 술을 홀짝이며 크산테를 생각했다. "어째서?"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너의 경력은 물론 연애도 도운 것 같으니 말이야." 토페의 코에서 술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었다.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었다. 두 사람의 흥겨운 웃음소리가 모닥불의 노래와 춤과 어우러졌다. "너의 그 자존심. 절대 변하는 법이 없군." 토페는 웃다가 한숨을 쉬며 탁자에 흘린 술을 닦았다. "그건 너의 가장 큰 강점이야. 나주마에 네가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해. 이런 시기에 더 나은 나주마의 긍지는 없으니까." 크산테는 편히 앉아 넓게 펼쳐진 밤하늘을 즐겼다. 그는 대화가 수백만 가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리라 상상했었다. 크산테의 성장과 함께 토페의 성공을 보고, 그와 화해하고, 그의 성숙함을 느끼니 안도감이 찾아왔다. 크산테는 야자술이 담긴 항아리를 쥐고 잔에 따랐다. "그리고 매로우마크에 더 나은 사령관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건배하지. 초월체든, 제국이든, 야수든—" "누구도 우리가 있는 한 우리의 고향을 위협하지 못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