勝沼町
일본 야마나시현 북동부 지역에 있었던 정으로, 2005년 11월 1일에 엔잔시, 히가시야마나시군 야마토무라와 합병되어 코슈시가 되었다.
승석문 시대 중반기에 있는 유적은 샤카도 유적분 범위에 포함된 촌락지터에 미야노우에 유적이 있다.
고후 분지 동부에는 고대 불교문화를 선진적으로 수용한 곳이지만, 고대 호족 사이구사 가문이 지은 다이젠지를 비롯한 고찰들이 있다. 가시오 산 정상에 있는 가시오잔쿄즈카는 동부 지방에서 빠른 시기인 1103년에 이름을 새긴 원통형 구리쇠가 발견된 경총으로 알려졌다.
중세 시대 때는 이사와(지금의 후에후키시 이사와초)에 본거지를 둔 카이국의 수호 다케다 가문의 영유지가 있으며 시모이와사키에는 다케다 일족의 분류로 전국 시대 때 노부마사와 수호 아토베 가문의 항쟁에서 멸망한 이와사키 가문의 관터가 있다.
전국 시대 때 무사 가문의 거관인 카츠누마 가문의 집[1]이 있으며, 거관과 중심으로 한 구획이 형성되었다.
1705년부터 카이 일국이 막부직할령화된 1724년까지 고후 번령에 속했다. 가시오 마을은 카츠누마 무라에 속한 다이젠지 령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하타모토령, 고후신덴번령, 고산케, 타야스케령도 존재했었다. 단 오사데무라의 대부분은 고후에서 교대 근무했었다.
1868년 다이젠지 부근에서 에도 시대 말기 때 무사였던 곤도 이사미가 이끄는 코요 진압대가 이타가키 타이스케가 이끄는 세이토 군에게 구축되면서 도망을 갔다. 그것이 코슈 카츠누마 전투였다.
메이지 시대 때도 카츠누마 슈쿠를 중심으로 번영을 이어갔다. 1903년에는 츄오선이 코후역까지 개통되었지만, 당시에는 철도역이 없었기 때문에 히가시야마나시군에서 교통 및 경제 중심지였던 곳은 엔잔이었다. 그 뒤, 역 설치 운동으로 1913년에 카츠누마역이 세워지게 되었다.
에도 시대 후반기 때 재배한 포도는 일부에서만 진행되었으나, 메이지 시대 초반기에 후지무라 시로가 주도한 생산흥업정책에서 과수 재배와 와인 양조업을 장려받았다. 1877년에는 포도주 회사가 설립되면서 프랑스에 교습생을 파견하고 양조 기술이나 와인 양조에 적합한 포도 재배와 품종 개량에도 힘을 쓰며 1887년부터 1897년까지 포도를 재배하는 농가도 늘어났고, 많은 양조 회사도 세워졌다. 게다가 양조용 품종이나 재배 기술 개량, 판매하는 방법 등 다양한 시행착오가 실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농지를 축소하는 정책이 시행된 적도 있었으나 종전 뒤에는 중핵시로 발달되었다.
[1]
다케다 노부토라가 동생 노부토모를 조상으로 삼고 있었으며, 다케다 가문이 군나이 영주 오야마다 가문을 복종시키자 군나이 지방에 대한 감찰로 축조된 저택이다. 엔잔에 있는 쿠로카와킨잔에도 가깝고, 요즘에는 금속융해물이 부착된 토기가 출토되어 있었다.